유럽 지성의 쌍벽으로 불린 세계적 석학과 한국 무명 기자의 설전
“제3의길은 존재하는가”란 도발에 대한 답변은..."전통적 좌파-우파이론은 모두 죽은 이론“
”한국은 새로운 사회모델 제시해 세계의 모범이 돼야“...대한민국 국민에 주는 충고

[오피니언타임스=이창섭 칼럼니스트]18년 전인 2004년 12월 영국 런던 시내에 있는 런던정경대(LSE. 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의 한 귀퉁이에 자리한 '세계지배구조연구센터(Center for the Study of Global Governance)'에서 유럽을 대표하는 세계적 석학으로 불리는 앤서니 기든스 교수를 만났다.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와 함께 유럽을 대표하는 지성의 쌍벽으로 불리는 기든스와 훗날 문재인 정권에 의해 ”부역자 및 적폐기자“로 몰려 숙청될 운명인 필자는 3시간 가까이 설전을 벌였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5000불, 영국은 4만불 수준. 이제 중진국에서 선진국을 향해 가는 걸음마를 시작한 극동 지역 국가 한국의  언론사 연합뉴스 런던특파원이었던 필자는 ”사회구조화 이론“으로 독자적 이론체계를 구축하고 마르크스주의의 결함과 자본주의가 낳은 양극화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제3의길“이란 대안을 제시한 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에게 매서운 비판을 가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등 유럽 중도 좌파 지도자들의 가장 존경하는 사상가에게 사회주의도 아니고 자본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은 ”현실과 야합“이 아니냐고 공격했다. 기자의 본질은 비판. 권력자이든 석학이든 날카로운 질문을 받아야 한다. 

앤서디 기딘스  영국 정경대 사회학 교수=영국 런던정경대 자료사진
앤서디 기딘스 영국 정경대 사회학 교수=영국 런던정경대 자료사진

 

자존심이 상한 기든스는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의 사회모델은 실패했다. 효율적일지 모르지만, 약자에게 너무 가혹하다. 유럽의 사회모델도 실패했다. 사회주의 과잉으로 역동성이 사라졌다. 늙고 병든 나라가 됐다. 한국은 가능성의 나라다. 한국인들이 미국식도 유럽식도 아닌 새로운 사회모델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인류에게 주는 큰 선물이 될 것이다“고 열변을 토했다.

필자는 ”미국식도 유럽식도 아닌 새로운 사회모델을 창조해야 한다“는 기든스 발언의 함의를 완전히 소화하지 못해 간단히 처리하고 말았다. 하지만 철 지난 좌파 이념에 매몰된 무능하고 위선적인 가짜 좌파들이 주도하는 문재인 정부의 폭주를 보면서, ”성장과 복지, 경쟁과 배려가 공존하는 새로운 사회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든스의 충고가 시간이 흐르면서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제 한국은 미래를 향한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진짜 보수, 진짜 진보가 마음을 열고 대화하며 토론을 통해 차이를 극복하는 새로운 통합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격을 높여야 한다. 곧 출범한 윤석열 정부에 ”새로운 사회모델을 만들어 인류에 비전을 제시하겠다는 큰 그림을 그리고 미래를 향해 뛰어라“고 충고한다. 

열정 넘치는 중진국 기자와 선진국의 석학 사이에 있었던 ‘작은 토론’의 결과물을 다시 공유하고자 한다. 18년 전의 인터뷰이지만 유럽을 대표하는 지성의 날카로운 통찰이 넘친다. 용어 정리 등 약간의 수정이 있었다. 

"전통적인 좌파 이론과 우파 이론은 모두 죽은 이론입니다. 세계화와 지식기반 사회의 대두, 과학기술과 통신의 혁명적 발전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낡은 이론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 연대와 결속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와 경쟁의 원리를 중시하는 신자유주의를 아우르는 제3의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좌파와 우파의 정치이념을 조화시키는 '제3의길(The Third way)'을 체계화한 유럽의 대표적 지성 앤서니 기든스 교수의 이론은 벤담과 J. S. 밀의 공리주의로 면면히 이어지는 영국의 전통적 '실용주의(pragmatism)'와 맥이 닿아 있었다.

기든스 교수는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통해 여러 차례 '현대화(modernize)'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급변하는 세계에서 전통적 좌파나 우파의 이론은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시대에 뒤떨어진 전통적 좌파 우파 이론은 극복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는 런던정경대(LSE. 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에 자리한 '세계지배구조연구센터(Center for the Study of Global Governance)'에서 가진 대담에서 한국에 대해 ▲서유럽의 실패한 사회복지제도를 뛰어넘는 새로운 사회안전망 구축 ▲여성의 획기적 사회진출을 통한 노동력화 ▲첨단 기술에 바탕을 둔 서비스 경제로 이행을 착실히 추진할 것을 권고했다.

 

--한국의 근대사는 급격한 변화로 점철됐다. 한국을 어떻게 평가하나.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60년대 아프리카의 가나보다도 낮았지만, 지금은 유럽의 포르투갈보다 더 높다. 바깥에서 본 한국은 놀라운 성공담이다. 하지만 문제없는 경제성장은 없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세계화된 시장경제체제 속에서는 굴곡과 기술변화, 전환을 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사회는 지속해서 '현대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현대사회에서는 경쟁력확보와 직업창출 그리고 공공기관의 역할을 통한 사회적 약자보호를 병행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국은 더 효율적인 사회복지제도가 필요하다. 한국이 해야하는 것은 유럽의 실패한 복지제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더 진보된 복지제도를 창조하는 것이다. 실업수당을 주는 '수동적인 복지제도'가 아니라 이를 뛰어 넘어 직업을 창출하고 실업자들이 직장을 갖도록 도와주는 '적극적 복지제도'를 구축해야 한다.

--고도성장 시기에는 직업을 갖는 것 자체가 안전망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도 저성장 시대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전통적인 가족의 역할이 붕괴했다.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한국에서는 결국 국가가 출산율이 높았던 시기에 가족이 제공했던 보호와 돌보기를 대체해야 한다.

여성의 역할확대도 중요하다. 여성을 노동력화하지 않고 성공한 선진국은 없었다. 노동력으로서 여성의 적극적인 참여가 한국에서는 더 성공적인 유럽국들에 비해 미흡하다.

복지제도와 관련해서는 성찰이 필요하다. 독일은 성공적인 복지제도를 만들었지만 이를 개혁하는 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은 고도의 복지제도도 없지만 이미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도입단계에서부터 유럽의 것을 모방할 것이 아니라 '현대화'한 복지제도를 도입할 것을 주장한다. 한국은 영국이 100년에 이뤘던 것을 30년에 이뤘다. 문제가 없기를 기대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다.

--한국은 분단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 남북통일을 비롯, 북한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가 한국 사회의 고민이 되고 있다.

▲남북한의 차이는 동서독의 차이보다도 훨씬 더 벌어졌다. 독일도 통일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고 지금도 어려움은 계속되고 있다. 모든 사람이 한국이 직면한 어려움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다.

북한 문제는 그러나 북핵 문제로 인해 지역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문제가 됐다. 나는 핵확산이 세계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시아에서 인도, 파키스탄, 중국을 넘어서는 핵보유국의 증가는 세계에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본다.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제한하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다. 세계는 새로운 핵보유국의 탄생을 원하지 않는다.

세계에는 진정한 공산주의 국가는 한 번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 없는 유토피아는 공허하다. 소련도 항상 '짜르(제정 러시아 시대의 황제)' 시대의 영향 아래 있었다. 북한도 봉건시대 영향 아래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결과적으로 한국과 비교할 때 일종의 '대재앙(disaster)'이라고 생각한다.

통일의 과정이 있다면 국제사회가 참여해야 한다고 본다. 매년 남북한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통일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동독 사람들은 서독사람들과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남북한에서는 이런 문제가 더 클 것이다.

--중국이 정치ㆍ경제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의 부상은 기회이자 위협이다. 중국의 부상을 어떻게 보는가.

▲중국은 먼저 산업화를 한 일본과 한국보다 더 큰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양국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중국은 당연히 지정학적 역할을 갖고 있다. 이는 세계화의 영향으로 한국만이 아니라 모든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은 조만간 교차로에 서게 될 것으로 본다. 놀라운 경제발전을 계속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런 발전이 언제까지 지속할지 모른다. 새로 생겨난 집단 간ㆍ지역 간 불평등을 어떻게 해결할지 우리는 모른다. 다음 단계에 있을 수 있는 거대 국가의 분열에 중국이 어떤 대응을 할 것인지도 관심사다.

정치적으로는 공산당이 스스로 개혁해 민주적인 정부를 만들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에서도 제3의길에 대한 논란이 유효하다고 본다. 동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 공산당도 사회민주주의로 전환해 야당의 존재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중국은 강력한 중앙통제와 시장경제 도입으로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가 성공하지 못한 소련에 비해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민주화는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중국의 개발이 완료됐을 때에는 유럽의 기업들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경쟁에 노출될 것으로 본다. 어제 TV를 사러 갔는데 모든 TV가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을 확인했다. 상표만 다르지 부품은 모두 중국제인 것이다. 이런 아웃소싱이 서구의 서비스 경제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도 직업 창출을 위해서는 첨단기술이 접목된 서비스 경제로 가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우리가 확실히 아는 유일한 미래다. 영국은 인구의 16%가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다. 30년 전에는 42%였다. 농업의 비중은 새로운 기술로 인해 더 낮아졌다.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이라크 침공은 부당한 전쟁이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토니 블레어 총리의 정치고문으로서 어떠한 입장을 갖고 있는가.

▲이라크 침공은 양면성이 있다. 나는 군사적 압력을 가할 강력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보았고 이라크가 갖는 중동에서의 위치, 유엔에 대한 거부, 인권기록 등으로 미뤄 10년 전 걸프전에서처럼 또다시 사담 후세인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있었다.

유엔의 승인이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고 블레어 총리는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합류해야 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후세인을 방치하면 이라크가 핵보유국이 되는 등 문제가 될 것으로 보았다. 이제 이라크를 재건해야 한다는 과제가 있으며 최소한 '준 민주주의국가(quasi-democractic state)'가 생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라크 침공으로 세계가 더 위험해졌다는 주장이 있다. 당신의 견해는.

▲이라크는 제2의 한국이 될 수도 있는 나라였다. 여러모로 그럴 잠재력이 있다. 교육받은 우수한 인력이 있고 한국과는 달리 엄청난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전쟁 지지, 전쟁 반대로 나누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이분법이다. 후세인은 대량살상무기 계획이 있었고 유엔을 거부했다. 유엔 부패 문제에서 드러났듯 유엔의 감시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세계가 더 안전해졌다고 본다. 후세인은 북한과 같이 핵보유국이 됐을지도 모른다. 내 견해로 세계는 새로운 핵보유국의 등장을 원하지 않는다.

--당신이 주장한 제3의길은 분명한 이념적 틀을 갖추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아직도 제3의길이 유효하다고 보는가.

▲현대 경제를 동유럽 국가들이 하던 대로 중앙정부가 관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세계화된 시장경제체제에서 케인즈이론을 어느 한 국가에 적용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없다. 좌측에 있는 사람들은 또한 시장원리만으로 사회를 운영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제3의 대안이 필요한 것이다.

세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기술혁신, 서비스 지식경제의 등장, 개인주의의 부상과 집단주의의 퇴조, 전통적인 가족제도의 붕괴, 인구의 노령화 등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다. 모든 산업사회는 이런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유토피아적인 좌파 프로젝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제3의길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제3의길이란 용어가 싫다면 다른 용어를 사용해도 좋다. 이는 중도좌파의 사고를 '현대화'하고 중도좌파 정당을 집권가능한 정당으로 만드느냐에 관한 것이다. 영국에서 제3의 길 실험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노동당은 2기를 집권했고 3기 집권이 가능한 상황에 와 있다. 과거의 노동당은 말만 내세웠지 실제로 이룩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제3의 길을 내세운 새로운 노동당은 직업창출, 경제안정, 복지개선 등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한국은 선진국 진입을 한 발 앞두고 비틀거리는 모습이다. 어떻게 해야 앞으로 갈 수 있는가.

▲오늘날의 사회가 경제적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는 걸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시장원리가 모든 것에 침투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공공부문의 역할이 있다. 정부는 부패를 최소화하기 위해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두 가지(시장 경쟁력과 공공부문의 역할)가 균형을 취하기 위해서는 건전하고 강한 시민사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사회다. 


 

<앤서니 기든스 교수 약력>
“구조화 이론” (Structuration Theory)이란 독자적 학문 체계를 연 가장 저명한 사회학자 가운데 한 사람. '좌우를 넘어서(Beyond Left and Right.1994년)' '제3의길(The Third Way. 1998년)' '제3의길과 그 비판자들(The Third Way and its Critics. 2000년)' 등 30여권의 저서가 35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전공인 사회학을 넘어 사회사상, 정치권력, 민족주의, 가족 및 성(性), 세계화 등으로 관심영역을 끊임없이 확대했다. 

슈뢰더 독일 총리, 블레어 영국 총리 등 유럽 좌파 정치인이  주창하는 정치, 경제, 사회 개혁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학자로 유명한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상원의원이 됐다. 평민에서 상원의원이 됨으로써 귀족 반열에 오른 기든스 교수에서 ”기든스 경(lord. 卿)“이 된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질문에 "사회 원로로서 국가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며 "정부에 의해 상원의원으로 임명된 것을 비민주적이지만 그것이 영국 사회의 관행"이라고 답했다.

기든스 교수는 1938년 런던에서 출생했으며 헐(Hull)대를 졸업한 뒤 런던정경대에서 석사,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0년부터 케임브리지대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해 1997년 런던정경대 학장이 됐다.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런던정경대를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반열에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창섭 전 연합뉴스 편집국장= 오피니언타임스
이창섭 전 연합뉴스 편집국장= 오피니언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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