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외 마스크 착용에 대한 논란이에 대해 mbn뉴스에서 보도하고 있다.=mbn뉴스 유튜브 영상캡쳐
실외 마스크 착용에 대한 논란이에 대해 mbn뉴스에서 보도하고 있다.=mbn뉴스 유튜브 영상캡쳐

[오피니언타임스=김봉성 청년칼럼니스트]심리적으로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간다. 무뎌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뎌져도 괜찮을 만큼 치명률이 낮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코로나는 나이가 어릴수록 무증상에 가까운 감기처럼 지나갔다. 중고등학생들은 코로나 검사 후 자가 격리를 위해서 양성을 기원했다. 양성 뜬 학생에게는 푹 쉬라는 인사말과 함께 학교를 안 가는 것에 대한 축하를 건네기도 했다.

청년, 중년, 장년들에게 코로나 양성은 축하를 주고받을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코로나가 두려운 존재는 아니다. 백신 3차까지 접종했다면 훨씬 더 만만해진다. 코로나는 그저 자가 격리 때문에 귀찮을 뿐이다. 이 귀찮음과 마스크를 써야 하는 귀찮음을 비교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다. 2년 넘게 외출 시 마스크를 써야 하는 일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인류사에 없던 생활 습관이 지긋지긋했다.

그런데 코로나가 종식되더라도 Z세대 이하로는 마스크 문화가 소멸될지 의문이다. 마스크는 이미 안경에 버금가는 필수품이 되었다. 안경이 시력을 교정해주듯 마스크는 외모 자신감을 교정해줬다.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평균적인 외모도 나쁘다고 인식되므로 가릴수록 얼굴이 폈다. 오죽하면 ‘마기꾼(마스크 + 사기꾼. 마스크를 쓰고 있을 때 호감형 외모였는데 벗었을 때는 별로인 사람)’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마스크의 사기성과 외모 자신감은 비례했다.

마스크의 일상화는 네 가지 측면에서 예상할 수 있다. 첫째, 마스크에 익숙해진 나머지 민낯을 보이는 일이 부끄러워졌다. 대면 수업이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으로 전환되었을 때 학생들은 자기 얼굴을 공개하지 않으려 했다. 화면을 끄거나 천장을 비추었다. 나 역시 선생이라 마스크를 벗었을 뿐, 목욕탕에서 알몸으로 학생을 만난 것처럼 어색했다. 대중이 기대하는 외모 평균 기준이 마기꾼 눈높이로 올라가 버렸고, 한 번 올라간 기준은 기름 값처럼 떨어지기 힘들 것이다.

둘째, 이미 ‘나’의 개념이 변하고 있다. Z세대는 필터로 보정된 얼굴, 제페토에서 구현되는 얼굴을 ‘자기 얼굴로 삼는 것’에 익숙하다. 본캐와 부캐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M세대인 나와도 다른 것이다. 본캐만이 있는 그대로의 생물학적 자신이라는 생각은 고루하다. 본캐는 내가 선택하고 꾸밀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다. 혹은 본캐 같은 여러 부캐를 거느리며 굳이 ‘나’가 하나의 캐릭터에 고정될 필요도 없다. 이들은 현실의 나와 인터넷의 나를 구분한다. 메타버스는 이 성향을 가속시킬 것이다. 이런 세계관에서 현실의 나는 마스크로 완성된다.

셋째, 이런저런 이유를 떠나 편하다. 마스크가 귀찮은 사람도 많지만, 그보다는 화장이나 면도하는 일이 더 귀찮은 사람도 있다. 각종 커뮤니티에서 화장/면도하지 않는 자유에 대한 증언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코로나 기간 동안 관련 업계 매출도 줄었다. 사람 만날 일이 적어진 탓뿐만 아니라 마스크로 간단하게 사회적 얼굴을 위장할 수 있는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당장 나도 면도를 건성건성 했고, 면도 간격이 늘어났다.

넷째, 앞선 이유들은 결국 사회적 얼굴을 만들기 차원에서 비롯되었지만 이제는 ‘건강’이라는 변명을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 전에는 황사나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를 꼼꼼히 챙기면 유별난 사람이라는 인식도 있었지만, 이제는 일상 용품이 되었다. 게다가 마스크 덕분에 감기를 비롯한 이비인후과 질병을 예방한 효과가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증명되었다. 짧게는 수 년, 길게는 수십 년 미세먼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므로 마스크 착용은 건강한 생활 습관으로 고착될 것이다.

마스크의 일상화는 환경 문제를 유발한다. 하루에 지구 단위로 생산되는 마스크 쓰레기는 어마어마하다. 우리나라로 한정해도 하루에 2,000만 개의 마스크 쓰레기가 발생한다고 한다. 코로나로 항공기가 줄고, 사람들이 덜 모이고, 소비가 줄어 일시적으로 회복되었던 자연은 마스크로 더 큰 오염을 더 오래 되돌려 받게 된 것이다. 이미 길, 산, 강, 바다, 어디에나 마스크 쓰레기가 있다. 마스크는 소각 시 다이옥신을 발생시키고 썩는 데 450년이 걸린다. 방역이라는 절대 명분이 사라지면 마스크는 일회용품일 뿐이다.

이 일회용품을 방역이 아니라 고작 반 쪼가리 얼굴 만들기 위해서 사용한다면 문제다. 마스크 화장은 개인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환경 윤리를 뭉개는 이기적 선택이자 마스크 한 장에 자존감을 숨기는 나약한 자해다. 물론, 기우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화장도 민낯의 상위 자아상이 되었고, 남성들 사이에서도 그루밍(grooming) 족이 생겨났으므로 마스크 착용이 새로운 화장법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마스크 화장은 지나치게 편리하고, 효율적이다.

한편으로는 외모지상주의가 펜데믹 수준으로 심각하다는 생각도 든다. ‘예쁜 것’을 ‘착하다’고 하는 시점부터 외모와 윤리의 경계가 허물어져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는 농담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어릴수록 외모에 신경 쓰기 마련이니 Z, α세대에게 마스크는 자기 자신을 위한 최고선(善)일 것이다.

이는 자존감과도 연계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얼굴이 착해지면 자존감도 올라간다. 그런 가짜 자존감이라도 필요한 만큼 청년의 삶 역시 팬데믹인 것이다. 청년들의 취업률은 희망하지 않는 것으로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무한 경쟁과 잇따른 패배 속에서 청년들은 왜소해질 수밖에 없었다. 중장년은 최소한 결혼 같은 소박한 성공 경험도 있지만, 청년은 연애도 어렵고 졸업 동시에 패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마음의 방역을 위해서 마스크 한 장이라도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마스크 착용이 일상화 된다면, 그것은 환경 윤리를 무시하는 이기적 선택도 아니고 외모지상주의 문제만도 아닐 것이다. 쾌적한 환경의 쥐와 달리 좁은 환경의 쥐가 마약에 중독되는 것을 보여준 쥐 공원 실험에서처럼, 마스크는 일종의 마약인 셈이다.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에 의지하며 ‘나’는 더 왜소해진다. 자신의 얼굴을 자신만 보는 밀폐된 나르시시즘 속에서 자기애는 썩어간다.

마스크를 벗는 일에 소소하지만 스스로 아웃팅(outing) 해야 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결단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나를 감추는 일에 꽤 중독된 것임을 자각해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는 자신의 얼굴이 당당하지는 못해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겨울 내내 봄을 충전한 씨앗처럼 슬슬 마스크를 벗을 준비를 할 때다. 코로나 펜데믹이 종식되는 날, 함께 봄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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