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ytn뉴스 유튜브 영상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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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타임스=김봉성 청년칼럼니스트]네가 왜 거기서 나와?

그런 기분이었다. 왜 제멋대로 복원되는가, 당신의 존재감. 인스타그램은 관계의 망각을 불허했다. 연락처 연동을 차단해 놓았는데도 과거가 불쑥 팔로우해 왔다. 그들이 싫다는 게 아니다. 죽은 이의 부활 같은 일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들은 내 현재와 연결되지 않은 죽은 현재다. 관계성을 잃은 것들의 연결 속에서 나는 ‘나’를 잃었다. 자발적 트루먼만 남았다.

SNS 이전에도 인간은 멀티페르소나를 수행했다. 한 인간은 누군가의 자식, 부모, 친구, 동료마다 역할에 맞는 인격을 꺼내 썼다. 좁은 사회에서 하나의 직업으로 거의 평생을 살아가는 두터운 관계 속에서는 개별 인격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아 ‘나’는 하나의 독립체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넓은 사회에서 다양한 직업과 역할을 가지게 된 얇은 관계 속에서는 개별 인격이 다양해진 만큼 차이가 크다. 친구들은 내 수업의 활기에 놀랐었고, 내 학생들은 내 일상의 냉소적인 유유자적을 의아해 할 것이다.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10대는 오프라인에서의 인격인지 온라인에서의 인격인지를 되물을 정도로 멀티프레소나는 일반화 되었다.

최근 인격A로서 개설한 인스타그램에 타인B, 타인C가 팔로잉해 왔다. 내 인생에서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도 못한 사람들이었다. ‘사람 찾아보기’에서 추천된 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제 스쳐가도 될 인연인데 굳이 나를 팔로우 해준 것은 고마웠다.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 관계망 컬렉션에 수집된다는 것은 내 존재감을 인정받는 일이다. 인간의 독립성이니 주체성이니 해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타인의 승인이 필요한 법이다. 팔로잉 수와 존재감이 비례하지 않더라도 상관성이 없을 수는 없다.

또한 반가웠다. 지금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을지언정, 한때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며 좋은 감정을 나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통해 추억을 복기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다만 의아했다. 왜 굳이 다시 관계를 복원하려 하는가? 이미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각자의 환경에 맞게 수렴 진화해 간 아종(亞種)이 되어버렸다. 내가 그들이 기억하는 내가 아니듯이 그들 또한 내가 기억하는 그들이 아닐 것이다. 달라진 것들의 조우는 불편했다. 단언컨대, 내가 먼저 과거를 팔로우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 찾아보기’는 부담스러웠다. 그 항목을 없앨 수 없어서 인스타그램에서 강제하는 관계 압력을 시각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연락처를 연동하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유명인들이 떴다. 그러다 팔로우 수가 들어나자 팔로워의 팔로워가 떴다. 친구와 만날 때, 내가 모르는 친구의 친구가 합석하는 것이 당황스럽듯, 내 공간에 틈입한 그들이 거슬렸다. 그들은 내 구성성분이 아니다.

가장 불편한 것은 어중간하게 아는 사람이 뜨는 것이다. 그들 역시 이제는 내 구성성분이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그들의 장례식에 내가 참여할 일도 없을 사람들이다. 이물질을 삼킨 듯했지만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나 역시 그들의 ‘사람 찾아보기’에 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불쾌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미적지근한 과거에 홍보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밥벌이를 위해 현재의 ‘고객’에게 내 ‘인격A’가 닿기를 바랄 뿐이다. 인격A는 비밀도 아니고 그들이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지만,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인격A가 그들에게 공개될 것을 생각하면 비밀이 탄로 난 것 같다.

싸이월드에도 친구추천 기능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가상 세계는 현실 세계의 부속 장치였을 뿐, 지금처럼 독립된 영역을 구축하지 못했다. 또한 멀티페르소나에 대한 개념도 미약했고, 대학생인 시절이어서 멀티 페르소나랄 것도 없었다. ‘난 나야’의 독립적 자아에 충실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먹어버린 나이만큼 연결된 영역이 다양해지다보니 그 다양성을 하나로 종합하기를 강제하는 인스타그램이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왜 서브 폰을 쓰는지 이해했다. 애초에 이메일도 인격별로 나누어 개설했어야 했다.

그렇게 팔로우 된 과거 중에 댓글로라도 대화를 나눈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그는 잘 지내지 못했고, 나는 잘 지내지 못함에 잘 견디라는 흔해 빠진 말을 했다. 좋았던 사이였기에 제법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그러나 선뜻 밥 한 번 먹자는 말을 못하는 데서 내 말에는 힘이 없어 보였다. 그 외 복원된 관계는 서로를 관음 할 뿐이다. 간혹 ‘좋아요’로 존재감을 교환했다.

가만히 따져 보면, 현재 진행형인 관계라고 해도 그리 대단할 게 없다. 시시껄렁한 자신을 포장해서 전시하고, 가십으로 소비된다. 차라리 ‘트루먼’이 진실했다. 트루먼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지만) 최소한 자신의 날 것을 보여줬고, 시청자는 트루먼에게 몰입했다. 나는 누구도 몰입하지 않을 인격A를 오늘도 열심히 전시하고 관람객을 모으기 위해 관심 없는 전시물에 좋아요를 눌러댄다. 카카오톡 친구를 모두 숨김으로 돌려놓은 것도 그들의 프로필을 멍하게 구경하는 게 한심해서였는데, 나는 꽤 적극적으로 한심해지고 있는 셈이다.

나는 관음 된다, 고로 존재한다. - 그런 시대가 되어버렸을까?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얇은 관계의 난립이 피곤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렸으므로 적응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인격A에 희생당하는 인격B, C, D를 돌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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