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선동(왼쪽)국민의당 당대표와 이준석 전 당대표=채널A뉴스 유튜브 영상캡쳐
권선동(왼쪽)국민의당 당대표와 이준석 전 당대표=채널A뉴스 유튜브 영상캡쳐

[오피니언타임스=칼럼니스트 양 평]국민의힘 내분은 보기에 따라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언론은 물가고와 국제사태가 험난한 상황에서 집권당이 집안싸움에 정신이 없다고 비난하만 우리 역사에서 언제 평화로운 시대가 있었으며 정파 싸움이 없었던 때가 있었던가?우리는 6.25로 쫓겨 간 피난 수도 부산에서도 정치파동을 겪어야 했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초토화된 상황에서도 당파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이순신과 원균의 다툼에도 그 당파싸움이 작용해 나라가 뒤집힐 뻔도 했다.그런 바탕에서 정치싸움을 살펴보면 유익한 데가 없지 않다.  그것은 ‘세비’라는 엄청난 품삯을 받는 ‘나라 머슴’들의 됨됨이를 잘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정치싸움이라면 대체로 정당간의 다툼을 떠올리지만 정당 내부의 분쟁이야말로 정치의 기본적인 생태를 보여준다. 공천권을 쥐고 있는 윤핵관 앞에서 의원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정치인들의 원초적인 생존조건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새삼 정치에 있어서 ‘정적(政敵)과 ’동지‘란 무엇인가를 묻게 한다. 따라서 정당의 내분은 정치인들의 자질과 내면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런 정당 내분이 마침 좋은 타이밍을 만난 셈이다.  메이저 리그 격인 대선과 총선이 모두 2년 뒤로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마이너리그 격인 내분이 본무대를 만난 것이다.메이저리그가 열리면 당의 내분은 가리어져서 보이지도 않는다. 대선 기간인 작년 12월 윤석열과 이준석이 벌였던 요란한 세력 싸움도 그들이  다 같이 빨간 후드의 커플티를 입고 나온 것으로 끝나버렸다.

그 후드티를 입고 있던 윤석열의 심기는 알 수 없으나 필자의 눈에는 어쩔 수 없이 쓴 약을 먹고 있는 모습으로 비쳤다.평생을 검사로 ‘영감님’ 소리를 들어오던 그가 갑자기 무슨 치어리더나 세일즈맨이 된 듯 “사진 찍고 싶으면 말씀주세요”라는 글자가 쓰인 후트티를 입고 있는 모습이 그랬다.

그가 싫어하는 게 뻔히 들어나다시피 한 이준석과 어깨동무를 하는 것도 그렇고...
두 사람은 12월 초의 그 분란이 있기 전부터 좋게 말해야 남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적보다 싫은 우군이었지 않은가.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면 지구를 떠나겠다”고 이준석이 했다는 말은 진위여부를 떠나 잊힐 수 없는 모욕이고 윤석열이 국민의힘에 입당할 때 하필이면 이준석이 지방에 가서 없던 시점을 택한 것도 우연일 수만은 없었다.

그럼에도 대선국면은 윤석열에게 후드티를 입혔고 갈등은 휴전상태로 들어갔다.하지만 오늘날 국민의힘 내분처럼 갈등이 드러난 경우는 차라리 가벼운 내분이라고 할 수도 있다.역사에서 보면 그처럼 껄끄러운 정적보다 가깝고 믿음직한 정적들에게 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

율리우스 시저가 믿었던 부하들의 기습으로 죽을 때 “브루투스 너마저도!”라고 외친 것이 좋은 예다.그런 경우는 동양에서도 흔하다. 일본 전국시대의 영웅으로 일본 역사 전반을 통해 가장 인기 있는 영웅으로 추앙되고 있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도 전국시대를 통일하기 직전에 믿었던 가신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배신하여 일으킨 혼노지(本能寺)의 변으로 몰락한다.

그런 정적의 메커니즘을 이용해 무서운 적을  적측 사람의 손으로 제거하는 변형 이이제이(以夷制夷)도 오래 된 수법이다.명나라 말기에 후금이 명나라의 명장 원숭환(袁崇煥)을 환관들의 도움으로 제거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원숭환은 후금이 오는 결정적인 길목인 산해관 일대를 철통같이 잘 막아서 후금은 명나라 정벌을 포기해야할 지경이었었다.

그래서 후금은 삼국지연의에서 주유가 조조의 부하를 역이용해 조조의 유능한 수군 장수들인 채모와 장윤을 제거한 것과 비슷한 수법을 쓴다. 후금이 명나라와의 잦은 싸움에서 생포한 고위층 환관 두 사람을 가두어 놓고 옆방에서  고위 장수들이 “원숭환이 후금에 협력하기로 했으니 베이징의 함락은 시간문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 뒤 후금은 명에 화의를 제기하며 그 환관들을 비롯한 포로들을 풀어주었고 환관들은 바로 자기네들이 들은 바를 황제인 숭정제에게 아뢴다.그 바람에 원숭환의 목숨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고 원숭환을 싫어한 환관들의 세력인 엄당(閹黨)이 이겨 원숭환은 죽고 명나라는 멸망의 길에 접어든다.

그 과정에서 문제의 환관들이 처음부터 후금과 짜고 원숭환을 모함했다는 주장도 유력하다.
복잡한 세력 다툼에서 자신이 누구에게 정적인지 동지인지 스스로도 분간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프랑스 혁명에서 주도 세력인 개혁파들 가운데서는 혁명 기득권 세력이 되어  부패한 패거리들도 있었다. 

그들은 청렴하고 엄격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성격을 알기에 자신들이 로베스피에르에게 적으로 보이는지 동지로 보이는지 고민하다 결국 그에게 반기를 들게 된다. 거기에는 로베스피에르의 실책 아닌 실책도 있었다.

그는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몰락하기 하루 전인 1794년 7월26일 국민공회에서 2시간 동안이나 “이 곳에 반혁명파가 존재한다”고 연설하면서도 누군가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의원들이 “오늘은 내가 죽을 차례인가?”하고 불안에 떨다가 반 로베스피에르 파인 장랑베르 탈리앵 편에 섬으로써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에 결정타가 됐다.

정권 다툼 같은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적들도 있다. 청일전쟁에서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이 일본에게 완패한 데는 그런 보이지 않는 내부 적들의 영향도 있었다. 이홍장은 일본의 해군 현대화를 의식해 중국 해군의 강화에 주력해 막대한 예산까지 확보했으나 그 돈이 서태후의 하계궁인 이화원의 증축과 1894년에 맞은 서태후의 회갑연 비용으로 날려 버렸다.

그래서 일본 해군에 맞선 청군은 신형 군함은커녕 포탄도 모자라 무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여기에는 서태후의 무지막지한 성격도 작용했지만 많은 신하들이 이를 부추긴 것도 큰 원인이 됐다.그 신하들은 막상 이홍장과 정권투쟁 같은 것을 벌일 터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홍장이 북양대신으로 너무 기세를 올리는 것이 싫어서 서태후에게 충성하는 척 하며 이화원의 호화판 증축을 권유했고 그것은 청일전쟁 국면에서 이적행위가 된 셈이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이홍장은 일본 자객에게 부상까지 당하는 액운까지 겹치면서  기세가 꺾인 채 말년에 이른 것이다.이화원 증축을 권했던 대신들은 청일전쟁의 패배에 후회했을까 이홍장의 좌절에 쾌재를 불렀을까.

전성기의 이홍장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는 눈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윤핵관이 한참 기세가 등등할 때도 그 비슷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는 눈은 많았을 것이다. 물론 그런 눈은 민주당보다 같은 당인 국민의힘에 더 많고...

양평 전 서울경제신문 부국장=오피니언타임스
양평 전 서울경제신문 부국장=오피니언타임스

 

양평 저자소개

한국일보 문화부 차장 

서울경제 문화부장 겸 부국장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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