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12년만에 16강 진출에 성공한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mbc뉴스 유튜브 공개영상 캡쳐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12년만에 16강 진출에 성공한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mbc뉴스 유튜브 공개영상 캡쳐

[오피니언타임스=김봉성 청년칼럼니스트]월드컵 16강 진출이 주는 감동은 2002년의 반의반도 안 된다. 추억 보정이 아니라 마음이 무뎌진 탓이다. 국제 경기로 자존감을 고양할 개도국의 시기는 지났고,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다양한 것이 큰 이유겠지만, ‘꺾여 버린 마음’의 보편화도 한몫한다. 16강 진출 확정 세레모니 중 활짝 편 태극기에 쓰인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을 보고서야 꺾여 있던 마음을 발견했다.

절망하지 않기 위해 희망하지 않는 것이 실천 윤리가 된 시대다. ‘노력은 결과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성장시대의 낭만이자 승자의 기만이다. 애초에 희망할 가치가 있는 결과들은 정해져 있었고, 그 수는 점점 줄었다. 성과 중심 사회는 ‘할 수 있다’를 기치로 패배자를 대량생산했다. 패배는 사회구조적 필연이었다. 높은 자살률과 저출산은 꺾여버린 마음을 통계적으로 증명했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문화 콘텐츠에서 주인공이 겪는 갈등이 예전만 못하다. 상상의 폭이 자유로운 만화에서는 더욱 극적이다.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에서 정립한 고난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소년 만화의 문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독자는 갈등을 참지 못한다. 이제는 처음부터 강력한 주인공이 문제 상황을 단숨에 해결해 버린다.

[노블레스]와 [원펀맨]이 ‘꿇어라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다’며 문제 상황을 ‘진심 펀치’로 한 방으로 제압하더니, 이제는 무림지존 ‘천마’조차 49,900원짜리 신사바지 3종 세트마냥 흔해 빠졌다. 아니면 아예 이(異)세계로 전생(轉生)한다. 현실에는 답이 없는 것이다.

현실성을 입힌 영화나 드라마도 만화의 문법을 따라 가고 있다. 영화 [범죄도시]에서 마동석은 처음부터 강력하므로 관객은 마동석과 악역이 만나기를 기대할 뿐이다. 두 인물이 만나면 영화는 종료된다.

팬데믹과 인플레이션, 넷플릭스의 보급으로 영화 산업이 하향하는 와중에도 2022년 유일하게 1,000만 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사이다’ 전개는 대중에게 잘 먹힌다. 이제는 TV 속 [어게인 마이 라이프]의 이준기와 [재벌집 막내아들]의 송중기도 다시 태어나서 ‘사이다’를 쭉쭉 들이켰다.

그렇게라도 시원해야 했다. 이제 열정만으로 ‘초사이어인’이 될 수 없음을 안다. 집 밖을 나가면 돈이므로 집 안에서 스마트폰 가지고 뒹구는 인생에 ‘영광의 순간’이 오지 않음도 안다. ‘포기를 모르는 남자’는 비참해지는 법이다. 인생이라는 경기는 이미 끝났다. 엔딩 크레딧 같은 여생을 지켜보는 인생만 남았다.

3포 세대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전 시대에 없었던 유표적 현상이어서 이름이 필요했지만, N포로 넘어가고 또 10여 년이 지나자 이제는 청년의 기본 옵션이 되어 굳이 명명할 필요도 없어졌다. - 너는 존재한다. 고로 할 수 없다.

이 시대를 살아낸 청년들은 울지 않는다. 산타할아버지는 없다고 냉소할 뿐이다. 선물에는 대가가 따른다고 믿는다. 냉소의 논리성으로 ‘후훗, 하찮은 닝겐들’의 중2병 감수성 같은 자존감을 채운다. 우르과이가 16강에 탈락하자 수아레즈가 울 수 있었던 것은 희망에 진심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런 눈물을 모르는 세대가 무럭무럭 자란다. 진심, 열정은 구시대에게 착취당하는 농락으로 이해될 뿐이다. 진심을 다해 열정을 쏟아 부을수록 손해 보는 것은 최저시급을 닮은 ‘나’다. 최저시급에 어울리는 가성비의 노력만이 나를 다치지 않게 한다.

이런 청년 세대에게 월드컵 대표팀이 불어 넣은 것은 비합리적 열기다. 아니, 청년 세대에 국한할 것도 없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대부분의 경제 지표들이 나빠져 사회 분위기 자체가 침울해졌으니 16강 진출은 대한민국에게 주는 선물이다.

대가는 응원이다. 그저 기뻐하면 된다. 수술 후유증 걱정하지 않고 몸을 던진 손흥민의 투지와 진심을 다한 노력만이 흘릴 수 있는 눈물의 뜨거움에 공감하면 된다. 그렇게 진심으로, 놀라면 된다. - 우와, 저게 되네?

우리 대표팀뿐만 아니라 언더독의 반란이 유독 많은 대회였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르헨티나를 이겼고, 일본은 독일과 스페인까지 무릎 꿇렸다. 현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들이 연이어 터지고 보니, 전생하지 않아도 현생도 승부 한 번 걸어볼 만하지 않을까, 그런 무모함이 울컥한다. 물론, 나야 16강 진출 확정 순간에도 이불 속에서 빙긋 웃고 말뿐이었지만, 그 시간 그 경기를 본 사람들이라면 소리를 지르든 박수를 치든, 조금 더 역동적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추세 전환 분기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해설이 된 안정환은 축구에서는 흐름이 중요하다고 했다. 상대에게 이끌려 나갈 때, 흐름을 바꿔줄 슛이나 허슬 플레이를 요구했다. 감독이 된 이승엽도 야구에서는 흐름이 중요하다고 했다.

상대의 흐름을 끊기 위해 선수를 교체하거나 흐름을 가지고 오기 과감한 작전을 지시하기도 했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입 모아 말하는 흐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의 흐름일 것이다.

‘할 수 있다’를 성장주의의 저주로 해석하던 시선을 교정할 때다. 월드컵 대표팀이 쓴 21세기 [노인과 바다] 같은 서사에서 두근두근한 상승나선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경기 후 팅팅 부은 손흥민의 얼굴 보기 부끄럽다면, 스스로에게 뜨거워질 장작은 남은 셈이다. 정말이지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 모양이다. 8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4년 후를 기약하는 한 패배는 아니다. ‘해볼 만한데?’를 품었다면 충분하다.

수 년 간 애용하던 복사집이 문을 닫았다. 장당 10원이 더 싼 데도 인근에 생긴 무인 복사집에 밀린 듯했다. 사람이 사람을 선호하지 않으니, 사람은 점점 쓸모없어졌다. 골목골목의 ‘임대’가 늘어났다. 우르과이, 독일, 벨기에는 방을 빼고 본국으로 돌아가 4년 후를 기약하면 되지만, 자영업자가 돌아갈 곳도 4년 후도 막막할 것이다. 취준생과 저임금 노동으로 인생을 파먹히는 사람들, 그리고 각자의 막막함에 맞서야 하는 사람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 마음, 다들 한 번 더 뜨겁게 속아 볼 수 있기를. 나를 꺾으려는 것을 ‘알 빠임?’하고 한 번 더 무시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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