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김봉성 청년칼럼니스트] 마블을 손절한 이후 극장에 다시 갈 일이 까마득했다. <탑건-매버릭>도, <아바타2>도 귀찮았다. 어지간하면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 극장은 아마 <스파이더맨> 복귀 때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더 퍼스트 슬램덩크>라니. 26년 만에 생환한 친구를 맞으러 극장에 갔다. 그것도 두 번이나. - 보고 있나 재중 군, 자발적 N회차 관람은 처음이라네.

사진 KBS 관련뉴스 캡쳐
사진 KBS 관련뉴스 캡쳐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노 재팬’은 구질구질했다. 국교를 단절하는 것이 아닌 이상 문화 교류를 막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더군다나 <슬램덩크>는 대체 불가의 사회 현상이었고,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아니라 ‘강백호’로 토착화 된 3040의 청소년기였다. 원작자가 어긋난 역사관을 보인 적도 없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90년대 문화의 첫 번째 레트로로 읽는 방식도 거부한다. 90년대 부흥은 2015년 <무한도전> ‘토토가’를 통해서 화끈하게 이끈 바 있다. 애초에 <드래곤볼>도 레트로라 일컫지 않으면서 <슬램덩크>를 복고에 가두는 것은 부당하다. <슬램덩크>는 현재 진행형인 현상이다. 그래야 한다. 내가 낡아버렸기 때문이다. 너는 친구가 아니라 나였다.

슬램덩크에 열광하는 주축은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중후반 출생자들이다. 우리는 ‘88만원 세대’를 연 ‘N포 세대’의 주인공이었다. 청년의 존 프레스 디펜스를 제대로 ‘돌파’하지 못한 채 나이 먹어 버렸다. 국가는 우리들의 실패를 기반으로 만든 정책으로 우리 아래 세대의 청년들은 왼손처럼 거들었지만, 우리는 속수무책의 중년으로 폐기했다. 아동, 청소년, 여성,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지만 N포 세대, 특히 평범 근처로 낙오한 보통 남성을 위한 나라는 없었던 것이다. 가부장 문화의 끝물에서 자라 남자라서 울지 않을 뿐, 우리도 위로가 필요했다. 그때, 26년 전의 내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예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3040을 너머 1020, 나아가 여성으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체념의 보편 정서를 흔들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인생에 적당히 체념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면 된다’는 386세대의 낭만이고, 남녀불문 3040이면 꿈이든 돈이든 좇기보다는 쫓긴다. 자신이 얼마나 작은지 실감하고 인정하는 것이 사회적 올바름이다. 요즘은 중학생들도 자신의 꿈에 체념을 부착해 놓는다. 대학을 졸업해도, 인서울해도, ‘서성한’이라 하더라도 별 수 없음을 예감한다. 20대도 안다. 시시하다 생각했던 아줌마, 아저씨들이 대단해 보일 만큼 자신은 비루한 존재다. -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나요? 전 없습니다.

우리는 채치수 같은 리더십도 없고, 서태웅이나 강백호 같은 천재도 아니다. 불꽃남자 정대만도 공백으로 체력이 부족할 뿐, 중학 MVP 출신에 산왕전 3점 슛 8/9의 사실상 MVP다. ‘내 이름이 뭐지?’라고 물을 수 있는 것은 그런 소수의 불꽃 재능러들이다. 평범한 것들은 자기 이름이 아니라 직책이나 호칭에 순응해야 밥 벌어 먹는다. 이름을 포기하는 물꽃남녀, 게거품이다, 우리 인생은.

우리는 송태섭이다. 180cm도 단신 취급당하는 코트에서 168cm로 살아남아야 했다. 존 프레스를 뚫고 나가야 하는 송태섭의 압박은 보통의 학생, 보통의 직장인의 숙명인 것이다. ‘내가 살아남아서 미안하다’는 송태섭의 고백은 어른이 된 우리가 17살의 우리에게 보내야 하는 편지 같다. 17살의 우리는 고작 이런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자기 스스로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고요.

돌파. 우리에게 필요한 카트르시스였다. 이 영화는 영화 후반 10여 분을 위해 존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기를 툭툭 끊어 먹는 듯한 송태섭의 서사가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덕분에 극장을 가득 채우는 심장 소리의 소요 속에서 침묵으로 된 ‘왼손은 거들 뿐’을 들을 때, 역전의 대리만족이 폭발한다.

우리는 대체로 ‘왜 난 헛된 시간을……’을 살았다. 아마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상대하는 사회는 늘 우리보다 크다. 그럴 때마다 손바닥에 쓴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고 주먹을 꽉 쥐면 어떨까 한다. 체념의 중심에서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제가가 징징 거리며 전투력, ‘내 전투력은 53만입니다.’ 시절의 무모한 힘이 잠깐이라도 솟을 테니까. 그 힘으로 살다 보면, 벤치 멤버였던 권준호의 3점 슛 순간 정도는 올 것이다.

3회차 관람 계획 중이다. 보고 싶다기보다는 응원한다. 목표는 일본 애니메이션 한국 흥행 1위 3,797,694명. 너의 돌파가 나의 돌파일 것이다. 너의 전국재패 낭만에서 나도 한 때 내 삶을 드리블 하던 돌격 대장이었음을 반추한다. 불꽃은 사그라진 게 아니라 잊힌 것인지도 모른다. 말할 때다. - 내 이름을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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