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김봉성 청년칼럼니스트] 근미래의 민주주의가 두렵다. 더 이상 민주주의는 ‘오답은 아닌 정치 체제’가 아닐 것이다. ‘국평오(국민 평균 5등급)’의 수준이 떨어질 것이 자명해졌기 때문이다. 한글창제에 반대했던 조선시대 학자들의 논리에 동의한다. 백성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이 무엇인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쓴 권력을 책임지지도 못한다. 선민의식 가득한 지방 사교육 강사 나부랭이가 더 무지해질 사람들에 의한 정치 체제, 민주의의의 수명을 진짜 지식인께 여쭙는다.

이세돌이 알파고에 패배했을 때, 바둑 기사들의 감정도 이러했을 것 같다. 자존심이 무너지는 정도는 귀여운 투정이다.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어서 막연했겠지만, 그 감정의 정체는 공포였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존재의 쓸모를 물어야 했다. 챗GPT의 등장으로 나도 묻게 되었다.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것을 가르치는 내 쓸모는 뭔가? 언젠가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할 것은 예상했지만, 지나치게 빨리 왔다. 인류는 챗GPT가 열어젖힐 대(大)무지의 시대를 맞을 준비가 되었을까?

사진 MBC 관련뉴스 화면 캡쳐
사진 MBC 관련뉴스 화면 캡쳐

 

챗GPT는 무지를 보편화할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생각’해서 정보의 조각들을 ‘종합’하는 것보다 AI가 ‘검토’해서 ‘산출’한 결과를 활용하는 것이 효율적이므로 인간은 주체적으로 생각할 이유가 ‘합리적으로’ 없다. 글쓰기조차 AI에게 먹히겠지만 글을 쓰지 않는 인간은 뭘까? 노예에 의존한 주인이 주체성을 잃듯, 인간은 자발적으로 AI에게 주체성을 양도하는 것이다. 귀족과 양반들은 지식을 축적해 나갔지만, AI를 거느린 보통의 인간들이 토니 스타크처럼 AI를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상황은 상상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가짜도 더욱 정교해져 합리적 판단을 내릴 근거조차 교란될 것이다.

교육 현장에서 인류의 보편적 무지화를 체감한다. 사교육 수학, 영어 선생들은 ‘내가 국어 선생인가 싶다’고들 한탄했다. 수학 선생은 학생들에게 문제를 이해시켜야 했고, 영어 선생은 한국어 작문을 설명해야 했다. 이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하면 학생들은 학교 선생님들도 그렇게 말했다고 반가워했다. 개인적으로는 상위권 학생들을 주로 접하는데도, 과거보다 저렴해진 어휘력에 깜짝 놀라고 있다.

문해력이 교육계 화두로 부상한 것은 스마트폰이 기본 환경인 세대가 주요 교육 소비자로 등장하면서였다. 스마트폰이 ‘외뇌(外腦)’가 된 세대에게 정보는 그때, 그때 신속하고 간편하게 검색되었다. 그래서 즉각적인 호기심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보였다가 다른 영역으로 생각이 쉽게 튀었다. ‘가만히’ 숙고하지 못하는 것이다. 드라마, 영화, 예능도 요약되었고, 대중가요도 3분 이내로 짧아졌다. 숙고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지만, 상위권 학생은 국영수를 우겨 넣었고, 하위권 학생들은 SNS와 유튜브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틱톡’화 했다.

인류가 교육 시설, 의무 교육 확충으로 전반적인 지적 수준도 향상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들이 당당해졌다. ‘사흘’의 의미를 모를 수 있으나 무지를 지적하는 것을 다양성을 무시하는 처사라 역공할 만큼 무지에 부끄러움이 없다. 그래서 개선 의지가 없다. 실제로 소수의 지식인들이 계몽을 위해 힘써도 ‘그건 네 생각이고...’라며 다수는 브렉시트와 트럼프를 선택했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한국은 보다 합리적으로 무지해졌다. 본격적으로 촉발된 교육 양극화는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sky 아래 ‘서성한중경외시’로 내려오는 서열의 하부가 실업에 가까워지고, 인구수는 줄어 대학이 무의미해져 대입 중심의 교육 체제에서 최상위권을 제외하면 교육의 유인 동기는 떨어졌다. 사회 생산성 향상으로 연애, 결혼, 출산만 포기하면 공부하지 않아도 굶어 죽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적정 수준의 쾌락을 저렴하게 누리며 삶을 깨작댈 수 있다. 유튜브에서 말하는 것을 따라하는 ‘OO무새’들이 들어났다.

정보화 시대, 인재상은 변했다. 대학은 5지선다에서 벗어나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학생의 역량을 평가하려고 노력 중이다. 여론은 학생부 종합 전형의 공정성을 묻지만, 대학은 학생부 종합 전형으로 선발한 인재의 성과를 확인했다. IB(국제 바칼로레아에서 진행하는 교육프로그램)의 확대도 이에 맞춘 노력이다. 이런 와중에 로스쿨 면접도 통과했다는 AI가 등장한 것이다. 딥러닝의 속도는 기하급수조차 초월하며 우리 일상을 파고들 텐데, 교육부가 재빠르게 움직인다 한들 AI의 속도를 따라 잡을 수 있을까 싶다. 숙의 민주주의의 시대, 자라나는 시민들은 쓸모없는 것들을 배우며 숙고하지 않는 것에 길들여질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는 오답을 수정할 힘을 가졌다. 민주주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개인의 권력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 근거해 운영된다. 설사 오류가 나더라도 투표로 교정할 수 있다. 시스템에 대한 신뢰, 그렇다면 오히려 묻고 싶어진다. AI가 아닐 이유가 무엇인가? 이미 AI 판검사에 대한 사회적 상상력이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 AI에 의한 지배는 플라톤이 제시한 철인의 강림 아닌가? 나는 지금보다 더 무지해질 사람들의 나라 시민이고 싶지 않다. 차라리 AI를 왕으로 옹립한 백성이고 싶다.

~라고 써도 될까? 혼란스럽다. 인류는 갑자기 나타난 AI에 어떻게 적응할까? 만약 AI가 자아를 가지게 된다면 공존 혹은 적대에 대한 윤리적, 실질적 대안은 무엇인가? 인간이 노동에서 해방되고 AI가 생산한 부를 ‘인간의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마르크스의 이상향이 실현되었을 때, ‘국평오’는 합리적이려고 노력할까? 과연 나는 배부른 돼지처럼 살 수 있을 때, 그 기회인지 저주인지 모를 달콤함을 포기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인간 같은 기계와 기계 같은 인간 사이에서 인간은 자발적으로 멸종을 선택할 것이라고 예상해 왔다. 이런 극단적인 예상은 먼 미래의 일이었고, 적응할 시간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이행될 것이므로 인류의 불행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의 저출산도 ‘한민족’ 소멸로 그치면 그뿐이라 여기며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챗GPT 급습은 강력하다. 인류가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을 것이다. 기후붕괴도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선을 넘었다는데, AI의 어떤 선은 어디쯤에 있을까?

격변 직전, 세상이 너무 고요해서 불안하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오가는 논의들을 듣고 싶다. 당장의 교육뿐만 아니라 AI에 의한 통치를 합의해 나가야 한다는 내가 틀렸고, 과민해져 있음을 누군가 계몽해주시길. 그럴 시간도 없으려나. 아니, 있다한들 무의미하려나. 당최, 냉소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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