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김수종 칼럼니스트] 탄소중립이 거스를 수 없는 인류 과제로 부상하면서 원자력이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재생에너지만으로는 기후변화 시대에 인류의 에너지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아직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원자력을 '전환 에너지'로 사용해야 한다고 이미 제시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작년 103세로 타계한 영국의 화학자이자 환경주의자 제임스 러브록이다.

러브록은 1970년대 ‘가이아(Gaia) 가설(假說)’을 주장해서 화제를 일으켰다. 가이아 가설은 지구 자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간주한다. 약 30억 년 전 지구에 생물이 출현한 후, 그 원시 생명체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땅, 바다, 공기와 상호작용하며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진화해나가게 되어있다는 게 요지다. 가이아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대지의 여신이니 요즘 의미로 해석하면 ‘어머니 지구’라고 표현하는 게 적합하다.

당시 주류 과학계는 러브록을 과학 이단자로 취급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가이아 가설은 환경주의자들을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가이아 이론에 의하면 인류가 지금 화석연료를 대량으로 소비하며 공기 중 온실가스 농도를 급격히 증가시키는 것은 자기 파멸을 부르는 위험한 일이라고 했으니, 지금 인류가 처한 기후위기를 그대로 반세기 앞서 대변했던 것이다.

러브록은 2004년 학회 연설에서 “21세기 안에 세계 인구 80%가 기후변화 때문에 지구에서 사라질 것이다.”라고 종말론적 예측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기후재앙의 파멸을 피하는 방안으로 원자력 에너지를 제시했다. 그의 원자력 옹호는 기후재앙의 피해와 원자력이 일으킬 피해를 비교할 때 기후재앙이 인류를 더 파멸로 몰아갈 것이라는 비교평가의 결과다. 주목할 대목은 원자력도 우라늄 광물의 한계 때문에 궁극적 해결책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물론 러브록의 원자력 옹호 발언은 반핵 환경주의자들의 반발을 불렀다.

러브록의 원자력 에너지 대안론이 설득력을 발휘하는 것일까. 반핵 물결이 높던 유럽에서 원자력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제기됐다. 바로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2022년 2월 원자력을 소위 'EU택소노미'에 포함하는 규정안을 만들어 시행하기로 한 것이다.

사진 YTN 관련뉴스 영상 캡쳐
사진 YTN 관련뉴스 영상 캡쳐

EU 택소노미(EU taxonomy)는 우리에게 아직 생소한 용어로 지난 한국 대통령후보 TV토론에서도 가십성 논란거리가 됐던 용어다. 유럽연합이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친환경적인 활동을 정리해 놓은 분류체계로 '그린 택소노미'(Green taxonomy)라고도 불린다.

EU택소노미는 쉽게 표현하면 금융기관 및 투자기관의 돈이 탄소를 배출하지 않은 인간활동으로 흘러가도록 규정한 친환경 분류 가이드북이다. 풍력이나 태양광은 당연히 포함되며 전력이나 수소를 저장할 수 있는 시설도 들어간다. 논란이 되었던 것은 원자력과 천연가스다. 천연가스는 석탄에 비해 탄소가 절반밖에 배출되지 않지만 여전히 화석연료라는 이유로, 원자력은 방사능 폐기물 등의 안전문제 때문에 보류되어 왔다.

사실 EU 집행위원회는 2020년 완성목표로 택소노미 규정안 작업을 벌여왔으나 일부 역내 국가와 기업의 로비로 1년 이상 지체되었다. 특히 원자력이 큰 쟁점이 되었다. 원자력 국가인 프랑스가 선두에 서서 동구권 국가를 중심으로 원자력을 친환경에너지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탈원전을 추구하는 독일 덴마크 스페인 등이 이에 반대했다. EU집행위원회가 1년의 진통 끝에 원자력과 가스를 전환에너지에 포함하는 규정안을 확정했다.

EU 국가들은 기후변화 대처에 선도적 역할을 해왔다. 1992년 리우지구정상회의를 주도했고, 2015년 파리기후정상회의에서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설정해서 파리협정 체결에 중추적 역할을 해온 것도 EU 국가들이다. 따라서 EU 택소노미의 녹색 분류체계는 전 세계 국가의 에너지 탄소배출 정책의 지표가 될 것이다.

작년 한국은 탈원전을 에너지정책 기조로 삼던 문재인 정부가 물러가고 원자력을 국가경쟁력으로 강조하고 있는 윤석열정부가 들어섰다. 문재인 정부에서 환경부는 EU 택소노미를 모델로 해서 한국형 녹색분류체계, 즉 K택소노미를 만들었으나 원자력은 뺐다. 윤석열 정부로서는 원자력이 포함된 EU택소노미를 당연히 반기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든 '2050년 넷제로', 즉 탄소중립은 대통령에게 주어진 엄중한 시대적 과제다. 대통령은 석유와 가스가 없는 미래를 상상하며 준비를 해야 한다. 에너지 믹스에서 원자력은 무시할 수 없지만 원자력 에너지의 미해결 부작용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그것이 과학을 강조하는 대통령이 갈 길이다.

원전에서 계속 나오는 폐연료봉 등 고준위폐기물은 넘쳐나는데 아직도 영구처리장은 입지선정도 안된 채 원전 울타리 안에 쌓여가고 있다. 세계에서 원전 밀도가 가장 높은 한국에서 폐기물의 안전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큰 숙제다.

또  재생에너지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사그라든다면 이 또한 훗날 예기치 못한 문제가 될 것이다. 왜 유럽연합이 원자력을 완전한 녹색에너지로 분류하지 않고 전환 에너지로 조건을 달았는지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김수종
김수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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