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경아 쉼표]

사람, 위스키, 전축과 레코드판. 방송사 프로듀서인 친구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에 소식을 알릴 때마다 올라오는 세 가지입니다. 그날 만난 사람과의 인연, 함께 마신 위스키에 담긴 사연,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 짓는 음악 이야기를 영화처럼 풀어냅니다. 전엔 늘 삶에 찌들어 보이던 친구인데, 아날로그 선율의 레코드판이 등장하면서 표정부터 몹시 편안해졌습니다.

누구나 행복의 조건이 있겠지요. 최근 지인들에게 가족을 제외하고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뭐냐고 묻자 다양한 단어들이 쏟아졌습니다. 책, 햇빛, 술, 숲, 바다, 영화, 작약, 바람, 커피…. 그중 가장 많이 나온 건 음악입니다. 좋아하는 곡을 들으며 뭔가를 하고 하루를 마무리한다면 이보다 더 편안하고 좋은 삶은 없다고들 말했습니다.

전문지 편집국장인 한 선배는 쉬는 날, 아내와 함께 책을 읽으며 음악 들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날 듣고 싶은 곡을 정해 반복 재생하면서 책을 읽다 보면 서너 시간이 봄바람처럼 따스하게 지나간다고 합니다.

특히 요즘엔 삼월의 화사함과 잘 어울리는 사라 브라이트만(63·영국)의 노래를 듣는데, 그의 목소리에 설레는 순간순간엔 책장을 덮고 선율에만 집중한다고도 했습니다. 브라이트만은 ‘타임 투 세이 굿바이’ ‘넬라판타지아’ 등을 부른 팝페라의 여왕입니다.

음악은 나의 행복 조건이기도 합니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 화장실 청소, 옷 개기, 설거지 등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집안일도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듣는 노래는 ‘봄날은 간다’입니다. 지난달 점심 식사 자리에서 서울 모대학 교수로부터 선물받은 유에스비(USB)에는 무려 쉰일곱 개의 ‘봄날은 간다’가 담겨 있습니다. 1953년 이 노래를 처음으로 부른 백설희부터 배호, 한영애, 심수봉, 조용필, 장사익, 개그맨 김보화에 이르기까지 누구 것을 들어도 다 몸에 감겨듭니다.

같은 노래를 계속 들으면 지겨울 것 같다고요? 노랫말만 같을 뿐 부른 이마다 장르, 음색, 리듬이 달라 같은 노래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노랫말이 가슴으로 절절하게 스며들 뿐이죠. 희대(稀代)의 절창이니까요. 같은 선물을 받은 언론 선배는 스산한 목소리로 신들린 듯 주절대는 한영애의 창법이 최고라고 합니다. 또 다른 이는 감정을 추스르지 않고 절규하듯 토해낸 장사익의 노래가 봄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전해줘 자주 듣는다고 말합니다.

사진 오피니언타임스 DB
사진 오피니언타임스 DB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1절)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2절)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3절)

작사가 손로원(1911~1973)의 노랫말은 화가 출신답게 풍경화를 펼쳐놓은 것 같습니다. 옷고름, 산제비, 성황당, 꽃편지, 청노새, 역마차, 신작로 등 한(恨)의 정서를 담은 토속적인 단어들이 저마다의 색깔을 입고 그림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합니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구절에선 이유도 없이 눈물이 주르륵 흐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마음에 쌓여 있던 우울함, 긴장감 등이 해소되면서 편안해집니다.

노래를 듣다 보니 완연한 봄입니다. 좋은 시절은 금세 가겠지요. 속절없이 떠나는 우리네 삶처럼. 부쩍 부고 소식이 잦은 봄날, 햇살이 반짝일수록, 꽃이 화사할수록 심란합니다. 마음 편안해지는 노래를 들으며 좋은 사람들과 봄밤을 즐겨야겠습니다. 이런 날 술을 마다할 수는 없겠지요.

#이 칼럼은 오피니언타임스와 자유칼럼 그룹간의 전재 협약에 따라 게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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