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엽서한장]

지난 3월 6일, 제게 아주 특별한 조카가 입대를 했습니다. 녀석은, 바로 아래 여동생이 서른 하고도 아홉 살에 낳은 귀한 아들입니다. 요즘이야 마흔 살 넘은 산모도 종종 눈에 띄지만, 녀석이 태어나던 1999년에는 보기 드문 노산(老産)이었지요.

저보다 두 살 아래인 여동생은 서른일곱 살에 다섯 살 어린 신랑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게다가 신랑은 여동생이 대학 시절 동아리에서 배운 수화로 봉사활동을 하던 중 만난 청각 장애인이었으니, 두 사람의 결혼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답니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기도하던 모습도 생각나고, 결혼식장에서 수화 통역이 이루어지는 동안 쉼 없이 눈물 훔치던 하객들 모습도 떠오르네요.

결혼한 지 2년 만에 조카 녀석이 태어나던 날, 여동생 시어머님께서 하신 첫마디가 “애 귀는 말짱하냐?” 였다네요. 제부(弟夫)는 돌이 채 지나기 전에 고열에 시달리다 청력을 잃었다는데, 부모님은 생활이 택택하였음에도 아들의 청력 회복을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셨고, 구화(口話)를 가르쳐야겠다는 생각도 안 하셨답니다.

장애인 아빠를 둔 조카에게 늘 유달리 마음이 쓰이곤 했는데, 녀석은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정말 훌륭하게 잘 커 주었습니다. 남자아이치곤 말이 빠른 편이었던 조카는, 돌잡이 때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이모를 또렷하게 불렀답니다. 그때 즈음 아들에게 수화를 가르쳐야겠구나 마음먹은 여동생이 가장 먼저 가르친 수화가 ‘아빠, 사랑해~’였다네요.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 수화로 ‘아빠’를 의미합니다. ‘사랑해’의 수화 표현은 왼쪽 손으로 주먹을 쥐고 오른쪽 손가락을 펴서 왼쪽 주먹 위로 원을 둥그렇게 그리는 것이지요. “종민아, 엄마처럼 따라해 봐.” 시범을 보여주었는데, 아들은 엄마를 빤히 쳐다보더니, 왼쪽 팔을 곧게 편 다음 오른쪽 손가락을 펴서 왼쪽 팔을 쓱쓱 문지르더랍니다. 여동생은 아가들이 말 배우는 과정이나 아들이 수화 배우는 과정이 크게 다르지 않구나를 느꼈다고 했습니다.

6살 무렵에는 교회 다녀오던 길에 이렇게 묻더랍니다. “엄마! 우리 교회에는 한국말 하는 사람이 몇 명이에요?” 그러니까 녀석에게는 엄마 같은 건청인이 하는 언어는 한국말이요, 아빠 같은 청각 장애인이 하는 수화는 외국어로 들리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빠와 뒹굴며 자란 조카에게 아빠의 장애는 아무런 편견이나 고정관념 없이 순수한 차이로 다가왔던 듯합니다. 지금도 “아빠같이 잘 생기고 멋진 남자가 왜 엄마(같이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랑 결혼했는지 모르겠다.”며 씩 웃곤 하니까요.

제부는 결혼 후 기능공 생활을 접고 신학대학 02학번 신입생이 되었습니다. 당시 신학대학에서는 청각 장애인 학생을 위해 수화 통역사를 고용했는데, 마침 제 여동생이 그 자리에 뽑혀서 부부가 함께 대학을 다녔습니다. 학비에 생활비까지 쉽지는 않았는데, 세상엔 기적이 있는 모양이라며 동생이 들려준 이야기인 즉, 독일 어느 시골 마을 한인교회에서 목사가 되고자 하는 청각 장애인을 위해 써 달라며 장학금을 지정 기탁한 덕분에 무사히 학업을 마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데 유로화로 도착하는 장학금이 환율로 인해 어느 학기엔 등록금에 모자라기도 하고 또 어느 학기엔 등록금보다 넘치곤 했다네요. 7년에 걸친 전도사 생활과 신학대학원까지 마친 제부는 장애인 특수 목회를 담당하는 어엿한 목사가 되었습지요.

사진 MBC 다큐 '청년,사나이가 되다' 화면 캡쳐
사진 MBC 다큐 '청년,사나이가 되다' 화면 캡쳐

그런 아빠가 아들이 군대를 간다고 하니 무척 좋아하더랍니다. 여동생 이야기론 청각 장애인 남자들 중엔 자신들도 병역 의무를 다하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나도 할 수 있는데... 나도 국가를 지키고 싶은데...’ 간절한 청각 장애인들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제가 부끄러워집니다.

참, 조카 녀석은 무심치 않으신 하나님 덕분에 넉넉지 않은 부모 형편 헤아리며 혼자 힘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재수도 하고 반수도 했지만, 한양대에 입학하여 4년 내내 전액 장학금으로 공부했습니다.

입대하던 주 토요일에 아빠와 동영상 통화를 하던 아들 녀석이 갑자기 눈물을 터뜨리는 바람에 아빠도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는 소식을 최근 전해 들었습니다. 모쪼록 조카 녀석이 건강하고 씩씩하고 늠름하게 군대 생활을 해 나가길 온 맘 다해 응원합니다. 아빠 몫까지 함께 하면서요.^^ 

#이 칼럼은 오피니언타임스와 자유칼럼 그룹간의 전재 협약에 따라 게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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