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고라니 칼럼니스트] 첫 팀장은 웃는 얼굴이 귀여운 아저씨였다. 동료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킬킬대던 그는 영락없는 초등학생 같았다. 마르고 작은 체형도 그런 이미지에 한몫했다. 제조회사의 군대문화를 걱정했던 난 팀장을 보며 안도했다.

팀장은 출근인사를 드릴 때마다 사람 좋은 미소로 답했다. 소통에도 적극적이었다. 아들이 내 또래여서 요즘 20대의 어려움을 이해한다며 힘들면 언제든 얘기하라고 했다. 6시가 되면 눈치 보지 말고 퇴근하라는 말도 거듭했다. 우리 팀장님은 민주적이라며 동기들에게 자랑하던 기억이 난다.

환상이 깨진 건 연말 임원인사가 난 다음이었다. 팀장은 주류였던 서울대 출신 팀장들에게 밀려 물을 먹었다.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고, 다들 눈치 보느라 퇴근을 못하고 있었다. 약속이 있던 난 일곱 시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귓가에 팀장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막내가 저따위로 일찍 가니 승진을 못했지."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사무실이 드라마세트장이라면 팀장은 관록있는 중년배우다. 속마음과 다른 표정을 짓고, 상황에 따라 행동과 말을 '선택'하는 데 능숙하다. 당신의 팀장이 온화해 보인다면 그건 팀장 스스로 온화해 보이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다혈질에 감정적인 팀장을 만났다면 팀장이 감정을 제어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나의 첫 팀장은 누구보다 능수능란한 배우였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는 편안한 이미지로 직원들에게 다가가 속마음을 파악하는 데 선수였다. 회사에 충성스러운 직원과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직원을 분류하고, 후자에 속하는 이를 인사이동 시즌에 다른 데로 보내버리는 물밑작업에도 능했다.

알고 보니 윗사람에게 지적받으면 부하직원 탓으로 돌리는 걸로도 유명했다. 왜 자격미달인 업체와 외주계약을 체결했냐는 임원의 지적에 "담당자인 라니씨가 검증한 업첸데... 다시 알아보라고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식이었다. 물론 업체는 팀장이 선정했고 난 보고서만 썼을 뿐이다.

처음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쓰던 가면이었는지도 모른다. 태어나길 음험해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나의 첫 팀장도 처음엔 무한경쟁의 사기업에서 자신을 지키려 가면을 꺼내 들었을 거다. 상사가 던지는 무례한 말, 일한 만큼 돌아오지 않는 부조리한 시스템, 온갖 갑질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말이다. 민낯으로 맞기엔 아픈 일이 너무 많고, 가면을 쓰면 표정이라도 감출 수 있으니까.

직급이 올라간다고 맨얼굴을 내보일 순 없다. 성과가 가장 우선인 회사에선 잘한 건 내덕이요 못한 건 남 탓으로 돌려야 내가 서 있는 지반이 단단해진다. 야망의 크기가 얼마인지를 떠나 저마다 생존을 위해 매일 연극을 이어가야 한다. 고용이 불안정해질수록 더욱 두텁고 다양한 가면이 필요하다.

비극은 시간과 함께 찾아온다. 처음엔 선택적으로 취했던 말과 행동이 점차 내면화되고, 진짜 나라고 여겼던 마음 넓고 당당했던 사람은 어느새 사라져 있다.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은 생존과 성공을 위한 도구일 뿐이며, 인간적인 존중은 내 커리어에 도움 되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강약약강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렇게 가면은 인격이 된다.

개인은 약하기에 환경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디까지 적응할지는 여전히 선택의 문제다. 나를 지키는데 꼭 가면만 필요한 건 아니다. 민낯으로 당당히 맞서야만 지켜지는 것도 있다.

우린 상대방의 가면 뒤 표정을 상상하며 신중한 태도를 유지해야 하지만, 간혹 만나는 진주 같은 사람을 놓칠 정도로 방어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연기와 진심을 구분하고, 선긋기와 존중을 구별할 줄 아는 눈을 키워야 한다. 그래야 적당히 얇은 가면만 메이크업용으로 쓰는 담백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나의 첫 팀장이 보였던 사람 좋은 미소는 연기가 아니라 그가 가진 얼굴의 한 면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부분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기엔 욕심이 많았을 수도, 환경이 너무 척박했을 수도 있다. 지금은 보다 넓은 마음으로 부하직원들을 대하고 있길, 작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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