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김봉성 청년칼럼니스트] 수능 끝난 날을 기억하시는지? 해방감이 만끽되는 와중에도 구석에서 존재감을 과시한 감정이 있었다. 내가 치열하게 매달렸던 그 공부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추진체에 지나지 않았다는 허탈함. 우리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쓸모없는 것에 지나치게 최선을 다했다. 부모님 반대로 자퇴도 못한 나로서는 교육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삐딱해질 수밖에 없었다.

공교육과 사교육은 다를까? 툭 까놓고, 두 교육 주체의 목적은 ‘좋은 대학 보내기’다. 공교육은 인성, 적성, 재능, 자아실현 같은 교과서적 명분이라도 세우지만, 사교육은 노골적으로 성적이다. 학생의 성적을 올리는 곳에 돈이 모이고, 돈이 모이는 곳에 사교육은 창궐한다. ‘좀 더 비싼 너’를 만들어 줄 수 있으면 ‘좀 더 비싼 수강료’를 받을 수 있는 사교육 이데아는 대학 서열이 굳건한 한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가장 비이성적인 형태는 부모가 아닐까 한다. 부모는 팔이 안으로 굽는 유전 법칙 때문에 자식의 일에서라면 알고도 당한다. 어머님 지금 늦으셨어요, 공포는 이성의 틈을 파고든다. 시장 사회에서 돈을 쓰는 쪽이 갑이기 마련이지만, 학부모는 자녀에게 갑이기도 힘들고, 사교육 시장에서도 자녀가 인질이라 다른 상품의 고객일 때보다 힘을 뺀다. 과외 다니던 시절, 내게 친절한 제 엄마를 보고 나처럼 되는 게 꿈이라던 학생이 있었다. 네 엄마는 너를 고작 나를 만들기 위해 그 돈 써가며 상냥해지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사교육을 받지 않았다. 교재가 있으면 선생이 불필요했다. 간혹 내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생겼을 때 물을 수 있는 만만한 선배가 있었으면 했을 뿐이다. 학교에서는 내가 아는 것을 가르쳤고, 야간 자율 학습 환경은 독서실만 못했다. 제대로 공부하고자 자퇴하고 싶었지만 지금도 자퇴가 흔하지 않은데, 당시 통념상 부모님에게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정작 국어로 사교육 밥을 먹기 시작했지만, 그때는 책 보면 다 나와 있는 걸 왜 돈, 시간 써가며 타인을 통해 들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다행히 1년도 안 되어 논술로 갈아탈 수 있었고, 교재가 아니라 이야기하고 함께 논해야 해서 내게 맞았다. 나는 학생들의 신뢰할 만한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로서 내가 갖고 싶었던 그, 만만한 선배가 되어 있었다.

그러면 되었다고 합리화했다. 공포라는 조금 비열한 방식으로 밥 벌어먹지만 나는 성적의 핵심이 되어야 하는 사고력에 근력을 더해주는 필수 영양제이자 트레이너쯤 된다고 여겼다. 그런데 나 같은 것이 생겨났다. 챗GPT의 등장은 내게 공포였다. 알파고 직후 바둑계가 그런 기분이었겠거니 했다. 인공지능 챗봇은 사용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압도적 나’였다. 지금 당장은 내가 낫겠지만, 내 밥벌이 수명이 그리 길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사진 KBS 관련뉴스 화면 캡쳐
사진 KBS 관련뉴스 화면 캡쳐

카카오톡 챗봇 Askup에 고1 수학 문제집 한 페이지를 사진으로 찍어 올렸더니 예닐곱 문제에 대한 해설을 10여 초 만에 해냈다. 수학이야 맥락과 무관하니 마음 놓고 감탄했지만 초6-중1 수준의 문해력 문제까지 풀어냈을 때는 당혹스러웠다. Askup은 여섯 문장으로 구성된 문단을 주고 ‘OO라는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문장을 고르시오.’를 해설까지 해냈다. 입시 논술 기출 문제를 푸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1,000자 이내 제시문을 탁월하게 요약했다. 후행하는 질문에 따라 복수의 제시문을 추상적 수준에서 비교하는 것도 제법 그럴 듯하게 수행해 냈다. ‘질문할 줄 아는 학습자’라면 더 이상 선생이 필요 없었다. 내 고등학생 시절 내게 절실했던 그 선배가 드디어 무료로 배포된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교육 강사가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챗gpt로 대표되는 인공지능 시대 대체 사교육의 쓸모는 무엇일까? 그저 많은 과제를 주고 ‘관리’해주는 것만으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부모가 하기 힘든 영역에서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주는 양육 도우미로 기능하기만 해도 될까? 이미 대학은 정시를 원하지 않았다. 내신과 수능은 토익처럼 쓸모없는 것을 인내하는 성실함을 측정하는 도구에 수렴(2023년 3월 28일 kbs ‘30살 수능, 길을 잃다’ 참고)해 갔다. 인공지능은 내신/수능의 민낯을 더 빠르게 드러낼 것이다. gpt를 활용하는 것과 의존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이며 그 적정선은 어디일까? 한 마디로, 모르겠다. 모든 전문가의 말이 맞는 것 같다.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라는 것은 분명한데, 대체 어디까지 뒤집어질지 가늠이 안 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공지능 친화적이되 의존적이지 않은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정도다.

그래서 고등학생에게는 인공지능 챗봇 사용을 적극 권하고 있다. 당장 대학 때문에 확실한 결과가 필요하다. 수학 문제를 대신 풀라는 게 아니다. ‘질문할 것’을 질문하라는 것이다. 인공지능 챗봇은 수행평가 수행 효율을 극단적으로 높여줬다. 특정 주제를 꾸며야 하는 ‘독창적’ 해시태그 여남은 개를 3초도 안 되어서 제시했고, 키워드만 주면 관련 논문을 소개해주고, 초록도 번역해주고, 관련 질문에 대답해주며 새로운 논문이나 책을 제안해줬다. 정보 연계의 효용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써야 할 글의 초안도 잡아줬다. 학생의 후처리 과정에서 의존과 활용의 경계가 갈릴 테고, 그 경계가 내 자리인가 했다. 내 자리에서 중학생의 인공지능 활용을 고민 중이다.

‘쓸모없는 것을 인내하는 성실함’은 관료체제에서나 유효할 뿐이다. 지금은 성실한 개미가 아니라 특화된 베짱이가 겨울을 나는 시대고, 10년 후는 더 극단적으로 변할 것이다. 아직, 시장 움직임은 더디다. 하던 대로 국영수다. 그래서 내 학생들에게 더 집중한다. 너희들과 너희 부모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오기가 든다. 뻔뻔한 말이지만 나는 30여 년 늦게 태어났어야 했고, 더 일찍 태어나 아쉬웠던 것을 너희들에게 제공할 것이다.

확신은 없다. 다만, “(가), (나), (다)를 비교한 후, 이를 바탕으로 (라)의 문제를 설명하고, (마)를 활용하여 해결책을 제시하시오.”에 답할 수 있는 것은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으로서 지킬 수 있는 최후의 존엄성이라 생각하며 가르칠 뿐이다. 내 밥그릇 챙기기 위한 분투가 내 학생 미래 밥그릇 챙기는 정답에서 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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