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수 몽당연필]

사무자동화(office automation)는 말 그대로 수기로 작성하던 사무를 컴퓨터 등으로 작업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무자동화 초창기에는 지금처럼 인터넷 기능이 없었습니다. 본사 ‘전산부’에 연결된 메인컴퓨터에 각종 자료를 입력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사무자동화가 가동되기 이전에 각 부서의 과에서 2명씩 사무자동화 요원이 선발되었습니다. 사무자동화라는 개혁적 발전 방법으로 보기보다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컴퓨터’라는 인식이 강해서 각 부서장은 거의 강제로 사무자동화 요원을 차출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부서에 있는 컴퓨터는 프로그래밍 기능은 없고 도표에서 함수를 구하는 엑셀 기능과 공문서를 작성하는 HWP 기능만 있었지만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었습니다. 그 시절 저는 매일 새벽 6시에 출근해서 아침 8시까지 소설을 썼습니다. 완성된 단편을 합평을 받기 위해 두벌식 타자기를 이용해서 타이핑 후 복사하려면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컴퓨터는 쓰고 지우거나 복사가 한꺼번에 해결된다는 것을 알고 사무자동화 요원으로 지원했습니다. 덕분에 글 쓰는 속도도 빨라졌고, 곧바로 프린터로 출력까지 가능해서 좋은 날들을 보냈습니다.

몇 년 후에 어쭙잖은 전업작가의 꿈을 안고 사표를 냈을 때는 16비트 퍼스널컴퓨터를 사용할 때였습니다. 청계천에서 사들인 중고 컴퓨터에는 ‘천리안’이라는 PC 통신 프로그램이 깔려 있었습니다. PC 통신은 전화선을 연결하여 사용하는 까닭에 전화요금 부담이 커서 요즘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처럼 무한정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주로 자료를 내려받아서 컴퓨터에 저장 후에 읽거나, 꼭 필요한 자료가 있는 게시판을 검색하는 수준인데 하이텔에서 공짜 아이디가 나왔습니다.

사진 KBS 관련뉴스 화면 캡쳐
사진 KBS 관련뉴스 화면 캡쳐

한국통신이 하이텔이라는 통신을 만들어서 홍보차 농민 후계자들에게 지금 노트북처럼 생긴 단말기와 전화요금 걱정이 없는 무료 아이디를 나눠 줬습니다. 동생이 후계자 교육받으러 가서 단말기를 신청하여 저에게 양도했습니다. 더불어서 천리안 문학 게시판에 매일 글을 올렸더니 역시 무료 아이디를 제공했습니다. 나우누리라는 통신사가 있었는데 우수게시판 등록자로 선정되어 아이디를 받았습니다.

저는 ‘나무꾼’이라는 아이디로 세 통신사를 오가며 종횡무진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전국에 있는 동호인들과 자주 접속하게 되고 가끔은 서울이나 대구 대전 등에서 번개 모임을 하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을 넘어서서 무료로 진행이 되던 소설 사이트가 유료로 전환이 됐습니다. 유료로 전환이 되는 계기는 판타지소설과 무협이나 로맨스 소설의 독자 수의 폭발적 증가가 배경입니다.

저는 로맨스와 갱스터 쪽을 썼는데 다른 작가들과 다르게 일일 연재를 했습니다. 통신 3사에 매일 연재하려면 하루 200자 원고지 기준 50매 이상을 써야 합니다. 대부분 작가들은 통신문체(ㅋㅋㅋ, ……, 우엥! 등)로 썼지만 저는 종이책 발간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정석으로 썼습니다. 무엇보다 회를 거듭해 갈수록 잘 쓰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나중에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고료 수입도 대기업 부장급 두 배 이상으로 늘었습니다. 이때쯤 아내는 완전하게 직장에 대한 미련을 버렸습니다. 그 이전에는 은행 경력이 있으니까 다시 취직해서 안정된 직장에 다니며 매월 월급을 받고, 보너스를 받는 세월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통신에 유료 연재를 하기 전에는 100원짜리 환희를 하루 3갑씩 피웠는데, 연재를 시작하고부터는 500원짜리 솔 담배를 3갑씩 피웠습니다. 라면 한 개에 10원씩 하던 시절에 하루 150봉을 피워 없애 버린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루 14시간 이상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다 보니 술 마실 기회가 사라진 것입니다. 직장 생활할 때부터 PC 통신에 유료 연재를 하기 전에는 거의 연중행사 격으로 1년에 3~4일은 병원에서 위장병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 시절 습관이 돼서 그런지 지금도 원고가 밀려 있으면 한두 달 정도는 맥주 한 모금 안 마셔도 술이 그립지 않습니다. PC 통신이 끝나고도 거의 10년 동안 술을 마신 회수가 100일도 안 되다 보니 위장병이 깨끗이 완치됐습니다. 한마디로 임도 보고 뽕도 딴 셈입니다.

세상살이라는 것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8비트에서 시작한 컴퓨터가 286, 386 펜티엄으로 발전을 하는 사이에 인터넷 시대가 열렸습니다. 단순 통신 기능과 취미 동호인 사이트 수준의 PC 통신은 막을 내렸습니다.

인터넷 시대에도 여전히 돈을 내야 글을 읽을 수 있는 사이트는 성행했지만 저는 이미 종이책 쓰기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종이책으로 출간할 원고를 쓰기 시작하면서 담배도 끊었습니다. 하루 세 갑씩을 피울 때는 글 쓰는 방에 식당용 환풍기가 2대나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한여름에는 알몸에 팬티만 걸치고 종일 글을 썼습니다.

돌이켜보면 PC통신에 연재하며 글을 쓰던 시절은 거의 무채색이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황금기였을 그 10년 동안의 일기장은 말없음표의 연속이었습니다. 특별하게 여행을 다닌 적도 없고, 술에 취해 필름이 끊어진 적도 없었고, 생애에 남길 만한 무슨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니고 그냥 글만 썼을 뿐입니다.
초등학교 다니던 자식들은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고, 꽃다운 아내는 중년에 접어들어 있었고, 부모님 얼굴의 주름살은 더 늘었고, 농사를 짓는 친구들은 비료 냄새가 흠뻑 배어 있는 농부로 변해 있었지만, 저 혼자 담배 연기에 싸여 제자리걸음을 한 것입니다.

나이가 든 지금 돌이켜보면 그래도 꾸준하게 하루 10시간 이상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저력을 준 것은 PC통신 덕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칼럼은 논객닷컴과 자유칼럼 그룹간의 전재 협약에 따라 게시된 글입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