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도 맞장구]

1977년에 발표된 록 밴드 캔자스(Kansas)의 ‘Dust in the wind’라는 노래엔 “All your money won't another minute buy”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당신이 가진 돈을 다 합쳐도 단 1분도 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 곡은 캔자스가 연주한 곡들과 전혀 다른 장르의 곡이라서 발표가 되지 않을 뻔했습니다. 하지만 발표 이후 빌보드 차트 6위에 오르며 밴드를 대표하는 곡이 되고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서도 인기를 얻은 것을 보면 세상일은 가끔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비슷한 뉘앙스의 가사는 우리 가요에도 등장합니다. 정태춘과 박은옥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1984년 앨범에 수록된 ‘우리는’이라는 노래에는 “오늘은 또 순간처럼 우리 곁을 떠나고 또 오는 그 하루를 잠시 멈추게 할 수도 없는데, 시간은 영원 속에서 돌고 우리 곁엔 영원한 게 없는데”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영원한 시간 속에 잠시 머물다 가는 지극히 하찮은 존재인 인간에 대한 성찰을 노래한 곡인데, 이 곡을 들으면서 한동안 상념에 빠졌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시간은 사람이 소유하지도 컨트롤하지도 못하는 절대적이면서도 신성한 대상이었습니다. 적어도 이 노래들이 등장할 때만 하더라도 돈을 주고 시간을 살 수 있다는 얘기를 하면 실없는 농담으로 들렸을 겁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가치관을 흔들어 윤리나 도덕의 영역이 축소되면서 시간이 거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놀이공원의 프리미엄패스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익스프레스패스, 매직패스, Q패스, 해피패스 등 놀이공원마다 각각 다양한 명칭을 쓰고 있지만, 그 내용은 인기 놀이기구를 일반 고객보다 빠르게 입장하는 혜택을 돈을 주고 파는 겁니다. 쉽게 얘기하면 웃돈을 받고 새치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겁니다. 물론 새치기로 볼 것인지, 정당한 거래로 인정할 것인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사진 SBS 관련뉴스 화면캡쳐
사진 SBS 관련뉴스 화면캡쳐

얼마 전,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가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으로 시간을 사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데 이런 현상들이 정당한가?”라는 화두를 던지면서 놀이공원의 프리미엄패스가 다시 논란이 되었습니다. 사실 비슷한 문제를 이미 마이클 샌델이 2012년에 발간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책에서 다양한 예시를 통해 심도 있게 다룬 바 있습니다. 그런데 십여 년이 지나서 다시 논의의 장으로 올라온 겁니다. 이는 이 문제의 윤리적 측면에 대한 숙제가 아직도 크게 남아있다는 반증입니다. 사실 샌델 교수는 이 문제에 대해 강렬하게 질문을 던지기는 했지만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 십여 년 동안 세상은 흘러가는 대로 고민 없이 제갈 길을 갔고 그 결과 지금 똑같은 질문을 다시 마주하고 있는 겁니다.

미국에서 연수를 하던 2007년 여름에 LA에 있는 디즈니랜드를 방문했습니다. 그때 6살이었던 딸아이는 너무 신난 나머지 체력이 소진되는 것도 모르고 뙤약볕에 몇 시간씩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지쳐 보이는 딸아이에게 “오늘은 그만 놀고 나갈까?”라고 얘기를 했지만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날 저녁 벌겋게 달아오른 딸아이는 스멀스멀 열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체온이 40도에 육박했습니다. 어찌어찌 병원을 예약해서 진찰을 받았는데 미국 의사는 다른 합병증이 보이지 않으니 물만 많이 먹이라는 얘기를 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가지고 있던 상비약으로 며칠 만에 간신히 열을 떨어뜨리긴 했는데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고생을 했는데, 그새 다 잊었는지 아이들은 또 몇 달 후에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가고 싶다고 합니다. 예약을 하려고 홈페이지를 들어가보니 VIP experience 티켓이라는 것이 보였습니다. 내용을 보니 이 티켓을 구입하면 오전 9시에 라운지에 모여 간단한 아침을 먹고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면서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구경하게 되는데, 주요 어트랙션은 줄을 서서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입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티켓 가격은 기본 입장료의 두 배가 넘었습니다. 하지만 디즈니랜드에서 고생한 걸 생각하고 포기를 모르는 딸아이의 집요한 고집을 고려하면 나중에 병원비로 또 수백 달러를 쓰느니 이번에는 편하게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을 쓴 보람은 있었습니다. 그 넓은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버스를 타고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전혀 힘들이지 않고 다녔습니다. 몇몇 영화세트장을 돌아보고 인기 놀이기구를 타러 갈 때는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사람들이 기다리는 줄을 지나 옆문으로 들어가서 놀이기구 코앞까지 가서 대기 줄에 합류했습니다. 아무리 돈을 더 내고 티켓을 구매했지만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아무렇지 않게 중간에 훅 들어와서 바로 놀이기구를 타는 게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길게 늘어선 대기 줄을 보고 VIP 티켓을 사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놀이기구에서 난처한 상황이 생겼습니다. 쥬라기 월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놀이기구에는 옆문이 없어서 무작정 맨 앞으로 새치기하듯이 입장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가급적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모퉁이를 돌아서 놀이기구 입구로 들어가려는 순간 한참 뒤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어린아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그 슬픈 눈망울을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아직도 그 슬픈 눈망울이 바로 지금 보는 것처럼 생생합니다.

그때만 해도 프리미엄 패스는 자본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에서만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니 우리나라에도 Q-패스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프리미엄 패스를 놀이동산마다 도입해서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필자는 이 제도가 우리나라에서는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이용자들이 반발하고 불매운동까지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연휴나 어린이날 같은 특정일에는 프리미엄 패스가 순식간에 매진된다고 하니 세상이 많이 변한 듯합니다. 하지만 십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제도가 공정한지에 대한 논의가 틈만 나면 대두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필자는 그날 이후에 놀이공원의 프리미엄 패스를 사지 않고 있습니다. 나의 편리함과 만족이 다른 사람의 불편함과 다른 자녀의 슬픔을 유발한다면, 게다가 모두가 즐겁고 행복해야 할 놀이동산에서 어린아이들에게 슬픈 기억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비록 돈을 지불하고 정당하게 대가를 얻은 것이라도 내내 불편한 행복으로 기억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돈으로 사는 것도 억지스러운 일이지만, 남의 시간에 영향을 주면서 나의 시간을 절약하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해봐도 좋은 일 같지는 않습니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상형문자에 어린이의 마음은 세모, 어른의 마음은 동그라미로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잘못을 저지르면 이 마음이 회전하면서 뾰족한 모서리로 마음을 찌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모서리가 점점 닳아져 잘못을 해도 아픔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자본주의에 닳고닳아 우리들의 마음이 맨들맨들해진 것은 아닌지 고민과 성찰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 칼럼은 오피니언타임스와 자유칼럼 그룹간의 전재 협약에 따라 게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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