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재욱 생명에세이]

식목일과 함께한 하늘이 맑아진다는 절기 청명(淸明, 4월 5일)을 지나보내고, 봄비가 내려 백곡(百穀)을 기름지게 하는 봄의 마지막 절기 곡우(穀雨, 4월 20일)가 다가왔습니다. 산과 들녘이 연한 녹색에서 진한 녹색으로 아름답게 변하고 있는 자연 식생을 보며 대학 시절 식물생태학 전공 시간에 들었던 ‘참나무 문화대’란 말이 떠오릅니다. 일반 대중에게 친숙하지 않은 참나무 문화대란 말은 참나무 분포지역을 문명의 중심지역으로 일컫는 용어입니다.

사진 오피니언타임스 DB

‘자연(自然)’이라고 하면 먼저 떠올려지는 것은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소중한 산림과 물의 의미를 담은 ‘치산치수(治山治水)’이지만, 자연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기후입니다. 기후 다음으로 꼽히는 것은 지표(地表)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 집단을 일컫는 ‘식생(植生, Vegetation)’입니다.

식생은 기후, 토양, 지형, 생물, 인위적 요인 등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며, 인류 문화 형성의 주요 요인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생활양식이나 감정의 기반이 되어 형성되는 한 나라의 특징적인 문화는 그 나라의 풍토인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집니다. 우리나라가 사막지대나 초원에 자리하고 있었다면 예로부터 산은 자줏빛이고 물이 맑아 경치가 아름답다는 의미를 담아 일컫는 ‘산자수명(山紫水明)’ 문화가 빚어질 수 있었을까요.

온도, 강수량, 바람의 세기 등으로 표기하는 기후 요인은 온도계, 우량계, 풍향계와 같은 물리적 기기로 측정이 가능하지만 이들의 조화로 나타나는 총체적인 기후 효과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자연 현상의 총체적인 효과는 기후에 따라 조성되는 식생으로 표기가 가능합니다.

독일의 식물학자이며 기후학자인 쾨펜(Wladimir Peter Köppen)은 지구상의 기후를 기온과 강수량을 기준으로 열대, 온대, 아한대로 구분되는 수목(樹木) 기후대와 한대와 건조대인 무수목(無樹木) 기후대로 구분하며, 기후가 자연계에 미치는 영향은 눈으로 관측이 가능한 식생의 유형에 의해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는 식물의 군집을 나타내는 상록수림(常綠樹林)이나 낙엽수림(落葉樹林)이 기온이나 강수량에 대체해 기후를 눈으로 관측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반도인 우리나라의 기후는 자연 식생으로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 북쪽은 겨울이 심하게 추운 기후대로 소나무나 전나무가 많이 서식하는 침엽수림(針葉樹林)이 많은 데 비해, 남쪽 해안지대에는 동백나무, 대나무, 가시나무와 같은 사철 푸르른 상록광엽수림(常綠廣葉樹林)이 많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중부 지역은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냉온대(冷溫帶) 기후로 참나무와 떡갈나무처럼 가을이 되면 잎을 떨구는 낙엽광엽수림(落葉廣葉樹林)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기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식생은 우리 일상에 크게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참나무가 주종으로 단풍나무, 박달나무, 서나무 등이 함께 자라는 낙엽광엽수림에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고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 이어집니다. 이른 봄 잎이 피어나기 전에는 따스한 햇볕이 숲의 아래쪽까지 스며들어 제비꽃, 복수초 등 여러 가지 초본식물들이 꽃을 피웁니다. 여름에는 시원한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에는 만산에 단풍이 붉게 물들여지며 아름다운 ‘금수강산(錦繡江山)’을 이룹니다.

우리나라와 위도와 기후가 비슷한 유럽 일대와 미국의 동북부 지역에도 참나무, 떡갈나무, 너도밤나무 등의 낙엽광엽수림이 발달하고 있는데, 이렇게 참나무가 무성한 지역이 세계문화의 중심권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들은 ‘참나무 문화대’로 불리고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참나무 문화대 지역에서는 예로부터 도토리를 맷돌에 갈아 식량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우리나라도 옛 조상들이 도토리를 맷돌에 갈아 구황식량으로 이용해온 참나무 문화대에 속합니다. 우리나라 문화를 대표하는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색깔은 떡갈나무의 껍질에서 얻은 물감에 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참나무 문화대에서 살아온 우리 조상들의 예지가 승화되어 나타난 것으로 여겨집니다.

기후 조건과 식생 분포를 고려해볼 때 한반도의 대부분 지역은 참나무와 떡갈나무가 우세해야 하지만, 우리 조상들의 식생에 대한 편견으로 소나무와 제대로 자라지 못한 잔솔로 덮여 있는 지역이 많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소나무처럼 푸르고 젊게, 학처럼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송무학수(松茂鶴壽)’라는 말에서처럼 소나무를 ‘상목(上木)’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좀처럼 베어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참나무나 오리나무와 같은 낙엽광엽수는 ‘잡목(雜木)’으로 여겨 해마다 베어서 땔감으로 이용했는데, 이런 나무들은 베어버린 그루터기에서 다시 돋아나 1년에 한 키 이상으로 자라 올라 땔감으로 적절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가족, 친구, 연인처럼 우리 일상과 함께해온 ‘참나무 문화대’의 다양한 식생은 경제적, 문화적 배경을 이루는 ‘산수(山水)’와 함께 앞으로도 늘 우리 곁에 포근하게 자리할 것입니다. 여름이 시작되는 절기인 입하(立夏, 5월 6일)를 바라보며 진한 녹색으로 다양하고 아름답게 피어오를 자연 식생과 어우러져 행복하게 지내고픈 마음을 가다듬어봅니다.

#이 칼럼은 오피니언타임스와 자유칼럼 그룹간의 전재 협약에 따라 게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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