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엽서한장]
저는 무궁화 열차의 ‘찐팬’입니다. 조치원역에서 서울역까지 8,400원이면 해결되는 ‘착한 가격’도 맘에 쏙 들지만, 비교적 넉넉하게 앉을 수 있는 자리에다, 차창 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적당한 속도로 달려주는 여유로움이 참으로 좋습니다.
조치원역에서 출발한 무궁화 열차가 천안역에 닿을 때까지는, 서울촌놈의 어린 시절 로망이었던 전원 풍경이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한 달 전만 해도 꽃비 내리는 모습에 가슴 설레고, 저 멀리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듯 드문드문 피어난 산벚꽃의 정겨움에 취했는데, 어느새 창밖은 온통 싱그러운 연녹색으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흐드러지게 피는 봄꽃보다 수줍게 올라오는 신록에 더 눈길이 가는 순간, 나이 들어감을 실감하게 된다 했던 옛 친구의 말이 생각납니다.
천안역을 지나 전원 풍경이 사라지기 시작하면 주섬주섬 책을 꺼내 듭니다. 기차 안에서 읽는 책이라면 소설이 제격이지요. 예전엔 멋모르고 사회학 책을 펼쳐 들었는데, 한 장을 넘기지 못하고 덮어버린 적이 많았습니다. ‘캄캄한 방에 새까만 고양이가 보인다고 주장하는 이가 사회학자’요,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이야기를 아무도 못 알아듣게 말하는 이가 바로 사회학자’라는 조크를 그새 잊었었나 봅니다.
지난주에는 서울 오르내리는 동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오! 윌리엄>을 읽었습니다. 그토록 평범한 언어로 우리네 살가운 감정을 이리도 섬세하게 표현해 내다니 감탄하며 말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원작으로 알려진 새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를 읽을 때는, 두 여자 주인공의 운명이 뒤바뀌던 순간의 스토리에 취해 하마터면 조치원역을 지나칠 뻔하기도 했습니다.
무궁화 열차의 적당한 속도감은 잠을 청하기에도 안성맞춤입니다. 서울서 조치원까지는 1시간 30여 분 걸리는데 잠자기에 딱 좋은 거리입지요. 덜컹덜컹 열차 바퀴 소리에 잠을 청하노라면, 마감을 앞둔 원고 걱정도 슬며시 사라지고, 무섭게 올라오는 블루베리 밭 잡초 뽑을 걱정도 잊은 채, 꿀잠에 빠지게 된답니다.
한데 무궁화 열차 아니고선 맛볼 수 없는 진짜 맛은 따로 있습니다. 우연히 귀를 쫑긋한 채 엿듣게 되는 인생 이야기 속에 삶의 진수가 담겨있음을 깨닫게 되는 그 맛이요. 그날도 서울역에서 17시 27분에 출발하는 부산행 무궁화호 6호 차, 창 넓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옆을 둘러보니 마침 통로를 사이에 두고 4명의 할머니가 의자를 돌려 마주보며 앉아서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있었습니다.
제가 귀동냥으로 알아낸 것은, 할머니들 나이는 74세 아니면 75세. 고향은 충북 영동(永同). 1년에 한 번씩 서울에서 열리는 여중 동창회에 참석하고 내려가는 길인 듯했습니다. 동창회는 보통 쉰 명 정도는 얼굴을 보이곤 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쉬었다가 3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이번 동창회에는 ‘반타작’ 스물다섯 명만 참석했답니다.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저떻고 한참 이야기꽃을 피워 가는데 안양 지날 때쯤 휴대폰 벨이 울렸습니다. 집에서 아내 오길 오매불망 기다리던 남편이 어디쯤 내려오고 있는지 묻는 전화를 한 모양입니다. 1분도 채 안 되는 짧은 통화였지만, 전화 받은 할머니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는 걸 보니, 네 명의 남편 중 제일 먼저 안부를 챙긴 당신 남편이 무척 대견했던 모양입니다. “이 방 저 방 다 다녀 봐도 서방이 제일이래.” 하더라구요. 친구분들도 그 말에 저마다 손뼉 치며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수원역을 지나자마자 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이번에도 언제쯤 도착하려는지 확인하는 남편의 출석체크(?) 전화였습지요. 전화를 끊고 난 할머니, “매일 밥 같이 먹고 같은 방 쓰고 이렇게 살다가 서방이 먼저 떠나면 어떻게 하나, 난 너무 걱정돼. 혼자 남으면 못 살 것 같애...” 말끝을 흐리더니만 가방을 뒤적여 화장지를 꺼내 눈물을 닦더라구요.
세상에나, 70대 중반을 지나가는 노부부의 정이 이토록 두터운 걸 보니, 묘한 감동이 밀려오네요. 사랑은 진정 식는 것이 아니라 익는 것이 분명한 모양입니다. 오늘도 낭만이 숨어있는 무궁화 열차를 올라타면서 어떤 사연을 만날 수 있으려나 한껏 기대를 품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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