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낙 이런생각]

근자에 철학이라는 명사가 평상언어군에서 사라진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사회를 향한 쓴소리를 생각하면 1960~80년대 철학자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이란 어른이 떠오르는가 하면, 김태길(金泰吉, 1920~2009) 교수, 안병욱(安秉煜, 1920~2013) 교수, 김형석(金亨錫, 1920~ ) 교수가 활약하던 시절, 우리 사회에서는 철학 관련 이야기가 자주 오갔습니다.
김형석이란 노교수의 ‘홀로 외침’이 있어 철학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가 싶은 가운데 이제는 최진석(崔珍晳, 1959~ ) 서강대 명예교수가 철학의 명맥을 외롭게 이어가는가 싶습니다. 이러다간 철학이란 단어가 영영 사라진 사회로 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기까지 합니다.

얼마 전, 한 국내 재판부가 내린 판결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이렇게 피폐하였나를 생각하며, ‘철학이 빈곤한 우리 사회’를 가슴 아파했습니다.

“술 마시고 90분 뒤 측정한 알코올 농도 기준치에 0.005% 초과. 법원 무죄”라는 기사(2023.3.31.)를 보면서, 그 법원판결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사회가 소란합니다. ‘우리 사회가 무서운 것이 없다 보니, 이런 괴(怪)현상도 나오는가 보다’라며 혼잣말하다가, 결국 우리 사회가 철학의 결핍이란 중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철학 하면, 1960년대 초 의예과 시절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주변 학우들이 하도 철학, 철학 하기에 시쳇말로 ‘쪽팔려’ 서점을 찾아갔습니다. 책을 펼치자, 첫 문장이 피타고라스 (Pythagoras, 고대 그리스, BC 6세기)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중학교에서 기하학 시간에 ‘피타고라스 정리’를 배우면서, '직삼각형에서 빗변(c) 길이의 제곱(c²)은 다른 두 변(a,b) 길이의 제곱의 합과 같다(a²+b²)'라는 정리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하였던 것을 기억하면서 '기하학자가 왜 철학 이야기에 나오나' 궁금증이 더하였습니다.

책에서 제자가 “선생님은 현인(賢人, Weise)이십니다”라고 하였답니다. 그러자 피타고라스는 내가 무슨 현인? 현인이란 칭호는 오직 신(神, Gott)에게 한한 것이다. 굳이 말한다면, 지혜를 좋아하는 친구(Freund der Weisheit), 정도면 극치다.라고 한 데서 철학이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즉 친구, 친근한(Philus), 지혜(Sophia)의 어원학적 복합어인 ‘Philosophie’가 태동한 것입니다. (von Maurice Gex, 《철학으로의 입문(Einführung in die Philosophie)》, Francke AG Verlag, 1946).

그래서 서구 철학의 뿌리는 수학적인 논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동감하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Gogito ergo sum)”라고 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가 한 예입니다.
근대사에서도, 폰 바이츠제커(Carl Friedrich von Weizsäcker. 1912~2007)는 독일 원자물리학자로 나치독일 치하에서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하였다가, 전후 함부르크대학 철학과에서 교수로 봉직한 사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서양 철학의 근간은 수학적인 바탕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겠습니다.

반면, 한국을 비롯한 동양 문화권은, 철학의 저변에 관념적인 논리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충효사상(忠孝思想)이 그 한 예인가 싶습니다.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어른에게 효성을 다해야 한다’라는 ‘높은 지침’에는 따스함이 있습니다만, 냉기가 감도는 수학적인 논리는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직·간접적으로 서구화가 많이 진행되었습니다. 이제 서구적인 사고를 배제하고는 국제성을 공유·공생할 수 없는 환경에서 우리는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헷갈릴 수 있는가 봅니다.

사진 MBC 관련뉴스 화면 캡쳐
사진 MBC 관련뉴스 화면 캡쳐

근래 국내 사법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판 판례가 사회 문제로 크게 부상하는 것이 그 한 가지 예라 하겠습니다. 재판 결과가 알려지자 “술은 마셨는데, 음주운전이 아니라니???”라는 희롱조 언급이 사회에서 회자되니 말입니다. 듣고 보기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앞서 언급한 “술 마시고 90분 뒤 측정한 알코올 농도 기준 0.005% 법원 무죄”라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운전자는 오후 11시쯤까지 술을 마신 뒤 45분이 지나 중랑구 도로에서 사고를 냈고, 이후 다시 약 40분이 지나서야 경찰로부터 음주 측정하였는데, 나온 혈중알코올농도는 음주운전 처벌 기준 0.03퍼센트를 살짝 넘긴 0.035퍼센트였습니다. 재판부는 음주 후 30분에서 90분 사이에 혈중알코올농도가 최고치에 이른다는 점을 근거로, 운전 당시 운전자의 혈중알코올농도가 측정치보다 낮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글쎄요, 혈중알코올농도의 가감속도란 개개인의 편차가 클 터인데 말입니다.
우리네 재판부의 얼마나 ‘비수학적’ 논리가 판결에 영향을 주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골프 규칙은 서양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기에 흥미롭습니다. 그린에 오른 공이 홀(Hole)에 들어갈 듯하다가 홀 바로 앞에서 멈췄습니다. 그것도 바로 1cm 앞에서 말입니다. 여기서 산술적인 사고방식은 '130m 날아간 공도 1타, 홀까지 1cm 거리를 터치한 것도 1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규정이기 때문입니다.

근래 법원 판결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의 비수학적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산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결국 우리 사회의 ‘철학 결핍증’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학문은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도, 국내의 그 수많은 대학교 중에 ‘철학과’가 있는 대학교가 손가락으로 셀 정도랍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부끄러운 민낯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는 철학이 없다"라는 꾸지람 섞인 자조의 소리가 들리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수준 높은 조치가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요망하게 됩니다. 철학적 이성과 논리가 근간이 되는 법원판결을 기대할 수 있을까 싶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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