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경의 현대인의 고전 읽기] 아쿠다카와 류노스케 (羅生門)

한국인 4명이 받은 일본의 문학상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문학상은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이다(물론 이외에도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은 많다). 일본에도 문학상은 수십 개가 있으며 그중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아쿠다카와류노스케상(芥川龍之介賞)이 아닐까 싶다. 줄여서 ‘아쿠다카와상’ 혹은 ‘다천상’이라 부른다.

아쿠다카와 류노스케는 불꽃같은 작품들을 남기고 35세에 음독자살했다.
아쿠다카와 류노스케는 불꽃같은 작품들을 남기고 35세에 음독자살했다.

1935년 이시카와 다쓰조(石川達三)가 <창맹(蒼氓)>으로 영광의 1회 수상자가 된 이후 1944년까지 계속되다가 2차 세계대전으로 5년 동안 중단된 후 1949년부터 다시 시작되어 현재까지 87년 동안 168회에 걸쳐 이어져 오고 있다. 수상 횟수가 많은 이유는 1년에 두 명(전반기와 하반기)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로는 엔도 슈사쿠(33회), 오에 겐자부로(39회, 노벨문학상 수상자), 마루야마 겐지(56회), 무라카미 류(75회), 히라노 게이치로(120회) 등이다. 저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동서양의 각종 문학상을 수십여 개 받았으나 이 상은 받지 못했다.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1976년 상반기(75회) 수상작이며 그해에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되었으나 큰 주목을 받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 재간행된 이후 독자층이 늘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으로서 첫 번째로 아쿠다카와상을 받은 사람은 이회성(李恢成)이다. 1971년 <다듬이질하는 여인>으로 66회 상을 받았으나 당시 우리나라는 국력, 경제력, 문화적 수준이 높지 않았기에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그때 우리나라 1인당국내총생산액은 290달러, 일본은 2,272달러였다). 두 번째 수상자는 이양지(李良枝)이다. 1988년 <유희(由煕)>로 100회 수상 작가가 되었다.

아쿠다카와상을 한국 독자들에게 깊이 각인시킨 사람은 1996년 116회 수상자 유미리이다. 유미리(柳美里)는 1968년 이바라키현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일본 소설가이다. 즉 한국인 핏줄로서는 세 번째로 아쿠다카와상을 받은 것이다. 그때 그녀 나이는 28세였다. 소설 <가족시네마>가 한국어로 출간된 이후 한국을 방문해 독자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 네 번째 수상자는 현월(玄月, 본명은 현봉호)이다. 1999년 하반기에 <그늘의 집>으로 122회 수상 작가의 대열에 올랐다. 그러나 아쉽게도 네 책 모두 지금은 헌책방 사이트에서 구매해야 한다.

영화 ‘라쇼몽’의 무대.
영화 ‘라쇼몽’의 무대.

짧지만 찬연한 발자취를 남긴 신경쇠약 작가

<라쇼몽>은 매우 짧은 소설이다. 200자 원고지로 40매 안팎, 보통 크기의 책으로 치면 8쪽 정도 된다. 빨리 읽으면 10분 이내에 읽을 수 있다. 단편이 아니라 엽편(葉篇/葉片) 혹은 장편(掌篇)으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번역된 아쿠다카와의 소설은 대부분 짧은 소설들이다. 그는 1914년 <노년>부터 시작해 1927년 <어느 옛 친구에게 보내는 수기>까지 모두 51편의 글을 남겼는데 익히 알려진 <라쇼몽>, <코>, <참마죽>, <용> 등 대부분 짧은 소설들이다. <군도>, <지옥변> 등이 그나마 중편 이상의 분량이다.

아쿠다카와는 1892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일은 27년 후 조선에서 거국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3월 1일이다. 생후 7개월 즈음에 어머니가 발광하여 외가로 양자 입양되었다. 어머니는 그가 10살 때 사망했다. 그것이 원인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6세 무렵부터 신경질적이고 허약했다. 그러나 공부를 매우 잘해서 도쿄제국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1914년에 처녀작 <노년>을 발표하면서 문필가의 삶을 시작했으나 그 생애는 그리 길지 못했다. 35세되던 1927년에 타바다의 자택에서 베로날(Veronal 바르비탈)을 다량 복용하여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위장병, 신경쇠약, 불면증, 치질 등 여러 병을 동시에 앓고 있었다.

29살 때인 1921년에 <마이니치신문>의 해외시찰원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여러 곳을 여행하고 7월 말 한국(식민지 조선)을 경유하여 귀국했다. 그가 한국에 얼마나 체류했는지, 어느 곳에 머물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경로를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는지는 알지 못한다. 운이 좋았다면 춘원 이광수(29세), 육당 최남선(31세), 벽초 홍명희(33세)를 만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어쩌면 부산에서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었다.

아쿠다카와 초상화.
아쿠다카와 초상화.

살기 위해서는 어떤 짓을 해도 좋다(?)

“아쿠다카와라는 작가는 성실하게 인생을 생각하면서 특히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이 생각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 평론가 김광식(金光植).

“남이 돌아보지 않는 돌멩이를 집어와서 그것을 보석으로 갈아내는 비술을 아쿠다카와라는 작가는 지니고 있었다.” - 문필가 김소운(金巢雲).

일본과 한국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매우 후하다. 짧은 생애 동안 짧은 소설로 강렬한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작이 <라쇼몽>인데... 굳이 이 소설에 대해 설명하고, 평가하고, 비판하고, 상찬을 할 필요는 없다. 누구라도 단 10분만 투자하면 완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전문은 인터넷에 올라와 있으므로 어느 곳에서든 핸드폰으로 즉각 읽을 수 있다. 당연히 느낌은 각자 다르다. 그 다른 느낌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떤 짓이라도 해도 좋은 것인지’, 아니면 ‘아닌지’ 판단 내리면 된다.

참고로 이 소설은 일본 문학의 원류로 꼽히는 <콘쟈쿠모노가타리슈>(今昔物語集)의 29권 제18 「羅城門登上層見死人盗人語」(라성문등상층견사인도인어)에서 힌트를 얻었다. 아쿠다카와는 일본의 고대 이야기에서 제재를 차용해 여러 소설을 썼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의 자료에서 옮겨온 나 자신의 소설은 대개 이런 필요로 해서 부자연이라는 장벽을 피한 하나의 수단으로 쓰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는 현대의 사건을 제재로 소설을 쓰면 무언지 거북스럽고, 부자연스럽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고래의 이야기에서 차용한 <라쇼몽>은 현대인들에게 질문을 던져주는 비수 같은 소설이다.

일본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일본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알아두기

1. 일본 문학의 또 다른 출발점은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이다. 지금 범람하는 베스트셀러 소설을 읽기 전에 이 책을 먼저 읽기를 추천한다.

2.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도련님>, <나는 고양이로다>,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금각사>(金閣寺),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의 <파계>(破戒),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사양>(斜陽) 등은 한번은 읽어야 할 명작으로 꼽힌다.

3. 일본의 첫 노벨문학상 작가는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이다. <설국>이 대표작으로 꼽히는데 읽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

4. 장편소설로는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의 <풍도>(風濤), 고미카와 준페이(五味川純平)의 <인간의 조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人間失格), 야마사키 도요코(山崎豊子)의 <불모지대>(不毛地帶)를 권한다. 한때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의 <빙점>(氷点)이 베스트셀러가 된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잊혀진 작품이 되었다.

5. 영화 ‘라쇼몽’(구로사와 아키라, 1950년)은 소설 <라쇼몽>과 완전히 다르다. 이 영화에서 라쇼몽효과(Rashomon Effect)라는 단어가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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