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석순 프리즘]

오늘도 우리 정가는 싸움판의 연속입니다. 상대 허물이나 실수를 과장하고 빈정대고 헐뜯는 말싸움으로 날이 지고 샙니다. 단군 이래 가장 잘 먹고 잘산다는 이 시절 왜 그리 심사가 뒤틀리고 오가는 말들이 험악해졌는지.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그리 야박하고 야멸차고 표독하고 모질게 할 수 있는지. 저런 게 과연 나라와 백성을 걱정해서 하는 소리들인지. 간신히 일으켜 세운 나라를 왜 거꾸러뜨리려 애쓰는지. 방송 뉴스를 10분도 참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바깥세상으로 눈길을 돌리게 됩니다.

10여 년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껏 머릿속에 생생한, 흥미로웠던 일 하나는 2008년 미국 대선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아니, 실제로는 한 해 앞선 민주당의 경선이었지요. 이라크 전쟁 등 조지 부시 대통령의 8년 재임 기간 공화당 치세에 미 국민들은 신물이 나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니 대세는 민주당이었지요.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냐, 첫 여성 대통령이냐? 세계의 관심이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의 경선에 쏠려 있었습니다.

1863년 링컨 대통령이 흑인 노예 해방을 선언하고, 1870년에는 흑인의 참정권이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은 여전히 피지배 계층으로 인식되어 왔을 뿐입니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 여성 참정권이 확립된 것도 겨우 1920년의 일입니다. 흑인 남성이든 백인 여성이든 새 대통령은 미국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는 역사적 시점이었지요.

그 흥미진진한 경쟁에서 오바마가 승리했습니다. 검은 피부의 그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으로 선서하는 모습에서 세상의 변화를 실감했습니다. “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서 노예였던 이의 아들과 노예의 주인이었던 이의 아들이 형제애의 테이블에 함께 앉으리라는 꿈을.” 1963년 워싱턴 대행진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했던 웅변이 떠올라 감동을 더했습니다. 어쩌면 힐러리가 승리했어도 감동은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영국총리 리시 수낙(왼쪽) @ MBC  뉴스 화면캡쳐
영국총리 리시 수낙(왼쪽) @ MBC  뉴스 화면캡쳐

더욱 흥미로운 상황이 지금 해 저무는 노대국 영국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14년째 집권 중인 보수당의 다섯 번째 총리로 리시 수낙(Rish Sunak, 43)이 선출되었습니다. 1980년 영국 사우샘프턴 출생, 옥스퍼드대학에서 정치·경제·철학 전공, 미국 스탠포드대학 경영학석사(MBA). 무엇보다 그는 영국 최초의 비백인 총리입니다. 그것도 100년 가까이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인도 펀자브 출신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힌두교도입니다. 지난해 10월 25일 찰스 3세 국왕으로부터 제79대 영국 총리로 임명받는 그를 보면서 다시금 세상의 변화를 실감했습니다.

영국에서는 2010년부터 지금까지 보수당이 정권을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데이비드 캐머런의 초기 6년을 빼고는 지속적으로 불안에 흔들려 왔습니다. 2016년 국민투표에서 가결된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의 충격파가 컸습니다. 국민투표를 밀어붙인 책임으로 캐머런이 물러났고, 유럽연합과의 협상, 북아일랜드에서의 통관 문제, 국내 경제 문제 등이 뒤얽히면서 테레사 메이, 보리스 존슨, 엘리자베스 트러스가 줄줄이 총리직에서 사퇴했습니다.

존슨은 코로나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총리 공관에서 파티를 벌인 사실이 들통나서, 트러스는 무모한 감세정책이 경제혼란을 야기해서 더욱 큰 비난을 샀습니다. 여성 총리 트러스가 불과 45일 만에 보따리를 싼 직후 혼란을 수습할 구원 투수로 보수당이 내세운 인물이 바로 리시 수낙입니다. 그는 존슨 내각의 재무부장관으로 이미 능력을 입증한 터였습니다.

지난 3월 또 한 가지 깜짝 뉴스가 들려왔습니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부르짖는 스코틀랜드 제1당 SNP(스코틀랜드국민당) 대표로 파키스탄 혈통의 이슬람 교도 험자 유사프(Humza Yousaf, 38)가 선출된 것입니다. 그 역시 스코틀랜드 자치정부의 첫 유색인종 행정수반(First Minister)입니다. 1985년 글라스고 출생, 글라스고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유사프의 아버지는 파키스탄 펀자브 출신, 어머니는 남아시아 혈통의 케냐 이민자로 알려졌지요. SNP의 대표답게 유사프의 취임 일성은 “스코틀랜드 독립을 위해 줄기차게(tirelessly) 노력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이미 지난 2014년 독립 여부를 묻는 자체 주민투표를 실시한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45%-55%로 부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8년간 SNP를 이끌어온 스코틀랜드의 여전사 니콜라 스터전은 줄기차게 독립을 외쳐 왔습니다. 스코틀랜드 주민 상당수가 유럽연합을 지지하기 때문에 브랙시트가 강행될 경우 독립하는 것이 주민의 뜻에 부합한다는 명분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인근 북해 유전이 이들의 독립 의지를 부추긴 면도 없지 않습니다.

지난 연말 영국 대법원은 중앙정부와의 합의 없이 스코틀랜드 지방의회 단독으로 독립을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할 수 없다고 못 박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결, 중앙정부의 회유에 아랑곳없이 SNP의 제1 슬로건은 독립입니다. 스코틀랜드 행정수반 취임을 축하하며 협력을 요청하는 수낙 총리의 전화에 유사프는 도리어 “스코틀랜드 의회와 주민의 민주적 희망을 존중해 달라”며 중앙정부를 압박했습니다. 최근에는 SNP라는 당명을 아예 SIP(Scotland Independence Party; 스코틀랜드독립당)로 바꾸자는 강경파가 등장할 정도입니다. 007 영화의 제임스 본드로 유명한 숀 코너리도 열렬한 스코틀랜드 독립주의자였지요.

어쩌면 펀자브 한동네 선조를 가졌을지도 모르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후손들이 연합왕국(UK)을 지키려는 영국 총리로, 독립을 외치는 스코틀랜드 행정수반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대영제국의 운명이 이제 식민지 후예들의 손에 잡힌 꼴입니다. 과연 파키스탄 혈통의 무슬림 유사프가 인도 혈통의 힌두교도 수낙을 상대로 스코틀랜드 독립이라는 300년 꿈을 쟁취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우물 안에서 옥신각신하는 동안에도 세상은 이렇게나 많이 변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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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무굴 왕조가 멸망한 이후 영국의 지배를 받아온 인도는 1947년 독립하면서 힌두교의 인도, 이슬람교의 파키스탄으로 분리되었다. 파키스탄은 인도의 북쪽 동·서편에 나뉘어 있다가 1971년 인도의 부추김과 지원 아래 동파키스탄이 다시 방글라데시로 독립했다.

인도는 현재 인구 중 80% 이상이 힌두교도, 15% 정도가 이슬람교도다. 최근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인도국민당(BJP; Bharatiya Janata Party) 정부는 인구 과반이 무슬림인 잠무 카슈미르 지역 자치권을 박탈하고, 무슬림의 히잡 착용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 인도 역사상 최강의 왕조로 300여 년간 군림했던 무굴 제국을 몽골계 이슬람 왕조라는 이유로 고교 역사책에서 삭제하는 등 노골적인 이슬람 배척 정책을 펴 논란을 빚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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