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업무를 담당하다 보면 사회적 약자와 만날 때가 많다. 경제적으로 절박하거나 몸이 불편한 분들, 중증질환을 앓고 있는 분들도 많다. 이분들과 대면하면 절로 조심스러워진다. 혹시 내 말이 의도치 않게 상처되진 않을지, 더 도움 될 만한 제도는 없는지 열심히 고민하게 된다.

언제나 그렇듯, 사회적 약자 가운데에도 일정 확률로 무례한 사람이 있다. 무리한 요구를 하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고성과 욕설로 대응하고,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으면 다른 창구 - 관리자 내선번호, 감사실, 국민신문고 등 - 를 통해 분풀이를 한다. 일이 복잡해지는 순간이다.

사진 JTBC 관련뉴스 화면캡쳐
사진 JTBC 관련뉴스 화면캡쳐

문제는 높은 확률로 매뉴얼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힌 공공기관이라면, 강성민원에 대처하는 매뉴얼이 있기 마련이다. 우선 상급자가 대신 응대하며 민원인을 달래고, 그래도 진화되지 않으면 감사실 등 기관 차원에서 대응한다. 대응주체가 감사실이나 외부기관으로 바뀌면 담당자의 잘못이 있었는지 면밀하게 살피고, 과실이 인정되면 징계조치가 이어진다. 그리고 민원인에겐 시정조치 안내와 함께 사과를 드리게 된다. 과실이 없다면 어떤 법률과 규정에 기해 그렇게 처리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는 공방이 이어진다.

민원인이 사회적 약자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매뉴얼은 모르겠고 담당자 선에서 빨리 원만하게 끝내라는 압박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공공기관이 사회적 약자에게 불이익을 주었다는 소문이 날까 두려워서다.

예외적으로 규정을 확대해서 적용시키라고 할 때도 있지만 일부의 경우다. 이 정도로 일을 크게 만든 민원인이라면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렇다고 아주 특혜를 줄 정도로 요즘 공공기관 업무 절차가 불투명하진 않기 때문이다. 결국엔 민원인의 마음을 '진심으로', '와 닿게' 달래는 수밖에 없다. 다시 담당자의 몫이다.

사회적 약자에게 적절한 지원이 이루어지는 사회는 건강하다. 현재의 어려움을 개인의 불성실이나 판단착오 탓으로 돌리기엔 사회는 너무 복잡하고, 이미 많은 것이 미리부터 정해져 있다. 내가 가진 게 오로지 내 노력으로 얻은 건 아니듯이, 빈곤과 장애, 질병도 오로지 내 잘못으로 얻은 건 아니다.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건 공공부문의 역할이고, 시스템이 하는 일이다.

민원인의 분노 역시 시스템이 감당할 몫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일선의 직원들이 고스란히 그 분노를 감내한다. 담당자 개인에게 감정적인 봉사를 요구하는 문화 탓이다. 조직은 제도를 실행하는 담당자가 앞에 앉아 있는 이 분과 마찬가지로 감정을 가졌고, 무례한 언어에 상처받는, 그냥 사람이라는 점을 쉽게 간과한다.

제도에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본사에서 개선을 검토하거나, 소관부처에 정책 제안을 할 문제다. 그에 따른 경과를 안내하는 것 역시 민원 담당자가 아니라 담당부서에서 진행하는 게 마땅하다. 이미 민원인의 성화에 마음이 곪은 담당자에게 "힘든 분이잖아. 니가 참아."라며 방치하는 건 무책임한 처사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일이라는 구호 하에 개인에게만 책임감을 요구하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난 민원업무 짬밥이 쌓이며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다. 몇 마디를 나눠보고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처음부터 일이 커지지 않게 응대하는 노하우도 생겼다. 그러나 민원업무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직원들,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 보탬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입사한 직원들이 점차 소모되는 걸 보면 안타깝다. 연민의 마음을 가졌던 좋은 사람이 점차 방어적이 되고, 나처럼 그냥 직장인이 되어 간다.

사회취약계층을 지원하는 일과 조직에 속한 개인의 감정을 지키는 일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조직이 감당해야 할 일과 개인이 책임져야 할 일은 다르다. 직원 개인으로서 사회적 약자에게 가진 연민을 조직이 지켜줄 때, 비로소 공공기관의 서비스가 민원인에게 "와 닿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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