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까무잡잡한 외국인이었다. 내 사전에 붕어빵과 외국인의 개념적 인접성이 없어서 잠깐 사이를 두고서야 국적을 물을 수 있었다. 그는 방글방글 웃으며 방글라데시아 사람이라고 했다. 대구는 3마리 2천원인데, 이 동네는 2마리 1천원에 팔아야 한다는 한국말 푸념이 능숙했다. 붕어빵 몇 마리를 팔아야 최저임금 9,620원이라도 남길지 계산이 서지 않았다. 그날 내 붕어빵에는 외국인 노동자들 덕분에 경제 하부 구조가 지탱되는 한국 사회가 응축되어 있었다. 나는 다문화의 첨단, 국제도시에 사는 듯했다.

그러나 그건 내 생각일 뿐, 여론에 따르면 내가 사는 곳은 우범지대였다. 외국인이 많기 때문이었다. 당근마켓 ‘동네생활’ 게시판에서 외국인이 많아서 무섭다는 댓글에 '좋아요'가 쌓였다. 외국인이 많은 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10여 년 전만 해도 내 방에서 창문을 열어 두면 한국어 사이에 중국어가 섞여 들렸지만, 지금은 국적을 알 수 없는 외국어가 더 많이 들렸다. 출퇴근길에 관통하는 공원에는 히잡을 쓴 아주머니들이 아이들을 데려 와서 담소를 나누는 것도 종종 봤다. 특별히 거부감은 없었다. 어차피 우리는 서로에게 익명이므로 국적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사실과 관계없음.@ KBS '다문화의 도시' 다큐 영상화면 캡쳐
사진은 기사의 특정사실과 관계없음.@ KBS '다문화의 도시' 다큐 영상화면 캡쳐

주택가 큰 길은 밤낮으로 국적이 바뀌었다. 대학가 메인 거리와 한 블록 떨어진 주택가 큰 길은 낮에는 대학생과 노인들이 각자 분주했고, 밤에는 외국인 남자들이 득시글댔다. 굳이 ‘득시글'이라고 표현한 것은 파편처럼 따로 다니는 한국인들과 달리 그들은 주로 군집해 있기 때문이었다. 퇴근한 외국인 노동자들은 편의점 파라솔에 진을 쳤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600여 미터에 현지인이 운영하는 베트남 쌀국수 식당 4개, 이슬람 할랄 식당 7개가 있을 정도로 외국인은 다수였다. 그들 나라 식자재를 파는 아시아 마트도 늘었고, 중국어 간판은 이미 예전부터 풍경 중 하나였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는 공존하되 공생하지 않았다. 소 닭 보듯, 민족적 거리두기가 지켜졌다. 무감하다고 했지만, 나도 밤에 흑인 너덧이 공원에 모여 프리스타일 랩을 하고 있을 때 움찔했고, 공원정자에서 국적을 알 수 없는 외국인들이 술을 마시고 있을 때는 살짝 긴장하며 지나쳤었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본 경험도 있어 외국인과의 교류가 낯설지 않는 성인 남성이 이 정도면, 일반 여성들의 위화감은 더 클 듯했다.

편견의 부스러기를 없애고자 나 혼자 ‘먹어서 세계 속으로’ 챌린지를 시작했었다. 현지인들이 운영하는 식당은 외국이 맛있어질 수 있는 기회였다. 베트남 식당에서 쌀국수, 분보 후에, 꽃게 국수를 먹었다. 베트남 음식들은 국밥에서 확장된 면 음식으로 이해되었다. 나는 국밥도 좋아했고, 국수도 좋아했으므로 베트남은 입 안에서 ‘우리’로 타협되었다. 할랄 식당에서 먹은 라그만(lagman)도 소고기 국물의 새로운 국수여서 우리였다. 예상대로 다문화는 입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한국어가 결여된 우리의 불가능성을 경험하고 말았다. 라그만을 두 번째로 경험한 날, 계산서에 빵 값이 1,000원이 추가되어 있었다. 하얀 다기에 내주던 자스민 차도 평범한 생수와 종이컵으로 바뀌었다. 이유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사장은 한국어를 전혀 못했다. 세 번째 날에는 다른 테이블에는 빵과 자스민 차가 제공되어 있었지만, 내 테이블에는 없었다. 이 차이를 물을 수 없어 이 사태를 인종차별로 지각했다.

그 식당에 발을 끊었다. 그러다 최근 다른 할랄 식당에서 오해를 풀었다. 그곳 사장은 한국어에 능숙했다. 파스타 먹기 전에 나오는 크로와상과 달리, 할랄 음식점의 빵은 라그만과 함께 먹는 음식이었고, 가격은 따로 책정되는 것이 이슬람 식문화였다.

“입에 맞으세요?”

사장은 ‘맛있다’가 아니라 한국어 중급 수준의 관용구로 물었다. 나는 반가움으로 환대했다. 내친 김에 케밥에 입문했다. 케밥은 올해 먹은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

자스민 차는 영영 미제였다. 이전 식당 사장이 최소한의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면 지금쯤 나는 더 많은 할랄 음식을 맛보며 이슬람에 더 우호적으로 변해 있었을 것이다.

다문화는 현재이자 미래다. 인구수 대비 4.1%가 외국인이다. 불법체류자까지 감안하면 더 많을 것이다. 대략 대구 시민이 전국이 흩어져 사는 규모다. 유입되는 외국인은 늘고, 기존 한국인은 출산하지 않으니 이 비중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이들은 더 이상 손님이 아니라 ‘우리’다. 그래서 지하철 안내 방송에 일본어가 아니라 베트남어나 태국어가 포함되기를 요청한다. 우리가 되어 가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다. 베트남인과 태국인은 국내에 20만 명 이상 체류하지만, 일본인은 3만 명도 되지 않는다.

아울러 석가탄신일과 크리스마스 공휴일 폐지를 요청한다. 국가에서 특정 종교에게만 특혜를 베푸는 것은 이슬람에 대한 공식적 차별이다. 어차피 전체 인구에서 불교인 14%, 기독교인 17%, 천주교인 6%로 과반도 안 될 뿐만 아니라, 세대가 낮을수록 탈세속화가 진행 중이므로 국가에서 종교를 기념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국가는 모든 종교를 동등하게 기념하지 않는 것이 다문화의 미덕인 것이다. 일상과 제도가 바뀌면, 시민의 인식도 자연스럽게 전환될 수 있다.

단, 한국어만큼은 양보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가 ‘우리’일 수 있는 것은 소통 가능성 때문이다. 샐러드볼 정책은 환상이다. 공생하지 않는 공존은 작은 균열에도 큰 갈등으로 번질 수 있음을 서양이 먼저 증명했다. 현실적 다문화는 느슨한 용광로 정책일 수밖에 없다. 소통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하고, 공감하여 ‘우리’가 된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요청하는 것은 기존의 한국인이 베트남어나 태국어를 배워야 하는 것보다 정당하다.

언어에 위계가 서면, 문화도 언어 중심으로 재편되므로 문화도 위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먼 미래에 등권적 다원주의가 실현될 수 있을지 몰라도 아직은 아니다. 당신이 한국문화를 이해하는 한국어 화자일 때, 나는 일반 한국인을 대하는 무심함만큼, 당신을 우리로서 환대한다. 내가 흑인들과 이슬람 남성 무리가 두려웠던 것은 그들 자체가 아니라 한국어가 부재한 상황에서 발생할 오해였던 것이다.

코로나 펜데믹이 끝나면서 민간 방범대가 늘었다. 밤에 대여섯 명의 동네 주민들이 형광색 방범 조끼를 입고 경광봉을 들고 동네를 돌아 다녔다. 파편화 된 시대에 동네 공동체가 활동 중인 것은 반가웠지만, 그들을 지나치며 들은 이야기는 썩 반갑지 않았다.

“요새 외국 애들 때문에 너무 위험해졌어.”

당근마켓 동네 생활 게시판 여론을 만든 사람들은 아마 그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곳은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 아니라 ‘우리’ 동네이기에 그런 봉사 활동까지 하겠지만, ‘우리’를 애착하는 만큼 ‘우리’가 아닌 것에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베트남 음식과 할랄 음식을 맛본다면, 두 번, 세 번 경험한다면, 그러다 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면 인식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그러길 바랐다. 이 민간 방범대에 동네 외국인이 한국어로 끼어 있을 때, 현실적 다문화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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