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앤디
사진 앤디

목숨을 위협하고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야기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음에도 인생 최대의 고비를 맞은 기분이 든다. 심지어 거리에서 사람들을 볼 때 불행한 표정이 아닌 것만으로도 부럽단 생각을 한다. 웃고 있지 않아도, 그저 표정이 편안한 것만으로 저 사람들은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며칠 전 친한 동생과 술을 먹다가 울고 말았다. 실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 지금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게 싫은데, 특히 매일 가야 하는 회사가 너무 싫어 (학교 가기 싫은) 어린애처럼 펑펑 울었다. 동생이 말했다. 언니, 언니가 지금 누굴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도 아니고, 회사 나와도 잘만 살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망설여요? (그녀는 이 타령이 벌써 몇 년째 인지 잘 알고 있는 동생이다) 나는 대답했다. 있잖아 네가 네 빵집을 차리기 전에 나한테 직접 구운 빵이며 쿠키 갖다 줬던 거 기억나? 그때 나는 먹어보고 단박에 느꼈어. 얘는 자기 빵집을 차려도 잘 될 애라는 걸. 나는 그런 뛰어난 기술이 없어.

동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제발 본인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하지 말라고 위로해 줬지만, 나는 나에게 동생과 같은 한"빵"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일부러 날짜를 맞춘 건 아닌데 최악의 밤, 불행의 최고조를 찍은 그다음 날 캐리어를 쌌다. 미리 예약한 호텔에 체크인을 하기 위해서였다. 회사든 개인사든 정신적으로 발작할 것 같으면 해외로 뜨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이제 정말 늙은 건지 공항까지 갈 기력조차 없었다. 아직 못 가본 나라가 한 두 군데가 아닌데 체력이 벌써 이 지경이 된 것이다.

 비교적 남들이 괜찮다(?) 좋다(?)하는 궤적을 따라온 삶이었지만 배부르게도 난 늘 좋아죽겠다가 없었다. 이게 대체 뭐길래 그런 거지? 하는 기분의 연속이었다. 똥 된장 꼭 맛을 봐야 아는 게 아니라지만 나는 내가 꼭 경험해야만 납득을 하는 그런 사람이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드럽게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인간인 것이다. 다수의 욕망을 시험(?)하고 나서 나는 이거 아닌가 봐 하는 결론이 나도, 내 마음의 소리를 바로 따라가지 못하는 비겁한 인간이기도 하다. 특히 요즘처럼 나만의 욕망과 감정으로 찐득거려 내 선택에 망조가 보이면, 내가 잘못된 건가 싶어 갑자기 또 사람들의 욕망으로 눈을 돌리곤 한다.

한강뷰의 삶은 지금의 내 능력으로는 택도 없는 완전 다른 차원의 현실이기에 일단 체험부터 해보자는 심정으로 4박을 질렀다. 침실도 욕실도 한강뷰로 하기 위해서는 각각 따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이미 그럴 마음이었기에 체크인하면서 아무런 망설임 없이 추가비용을 냈다. 돈의 대가는 참 분명했다. 당연히 직원들의 서비스가 좋았고, 내 앞에 펼쳐지는 view도 차원이 달랐다. 첫날은 완전히 비몽사몽의 상태로 방에 틀어박혀 주야장천 한강만 바라봤다. 이것이 한강뷰라는 걸 눈에 각인이라도 하듯 앉아서 한강과 마천루가 자아내는 경관과 시간에 따라 변하는 해의 움직임을 감상했다. 아, 이래서 한강뷰, 한강뷰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내 내가 온갖 걸 내려다보는 그 시선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카이 다이빙을 했을 때 낙하산을 타고 누렸던 시선의 감동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고작 몇 시간도 안 되는 경험에 내가 뭐라도 된 인간인양 느껴졌고, 오만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잠깐 외출을 하러 나간 차 안에서는 이 시선을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일상의 삶으로 끌고 오려면 나는 지금 당장 무엇을 우선순위로 잡아야 하는가 하는 호기로운 상상도 해봤다. 최근 몇 달간 나를 괴롭혔던 모든 고민이 한 큐에 단순해지고 말끔해지는 순간이었다. 

두 번째 날인 어제는 서울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진행했던 스케줄 두 가지를 앞당겨 처리했다. 토요일에 했던 것을 평일의 여유를 가지며 했을 뿐인데 아주 나이스한 기분이 들었다. 체크인한 순간부터 느낀 건데 돈을 '쓰는' 일들은 나를 화나게 하는 일이 없다. 남에게도 나에게도 굉장히 관대해지고 젠틀해진다. 돈을 '버는' 곳에서의 나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도록 하겠다. 

사진 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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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줄을 마치고 호텔로 와서는 내 방이 아닌 Salon de Signiel로 바로 갔다. 공짜 와인과 샴페인을 차례대로 격파하고, 쿠키와 스낵을 집어 먹었으며, 비싼 숙박비에 포함되었을 서비스들을 찬찬히 누리었다. 물론 view 포함이다. 이 호텔 근처에 사는 사돈처녀와 술을 겸한 저녁을 먹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 누리기엔 아까워서 메시지를 보냈다. 1차로 이것을 누리고 2차를 가자고. 처음에는 사람들로 가득 찼던 라운지에 사람이 빠져 조용해지고 나는 사돈처녀에게 최근에 나에게 벌어진 일들, 구질구질한 흑역사의 한 페이지를 마구 뽐내었다. 사돈처녀가 언니에겐 힘든 일이라 죄송한 말이지만, 너무 흥미진진하고 재밌다며 귀 기울여주었다. 사실 이번에 이런 반응이 한 두 명이 아니었는데, 그럼 나도 스토리텔러로서의 '한 빵' 까진 아니어도 '한 조각' 정도는 욕심내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셋째 날 아침, 이 글을 마무리하며 역시 창문에 찰싹 붙어있는데 조금(?) 높이만 올라가도 이렇게 드넓어지는 세상, (자본주의에서의 돈의 위력을 실감한 것과는 별개로) 내 고민과 번뇌의 무게가 점점 가벼워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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