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이후 100여 일을 기억한다. 해도 되는 건 많아졌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우리는 그저 해야 하는 것에서 놓여났을 뿐이었다. 그것을 몰랐기에, 해도 되는 것 옆에 그득한 무력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도 PC방은 시간당 1,000원이었다. 야간 할인을 위해 밤낮을 바꿔야 하는 것을 자유라고 불렀다. 혹은 청춘이라고도 했다. 자유와 청춘에서는 식은 라면 국물 냄새가 났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아침이 온다는 확신이 있었다.

도서관에 가는 새내기를 두고 ‘건방지다’며 술로 ‘돈쭐’내던 선배들의 낭만은 그럭저럭 타당했다. IMF를 정통으로 때려 맞은 당신들의 선배들도 자기 밥그릇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당신들은 당신들의 미래를 엇비슷하게 그렸을 것이다. 그리고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나는 88만 원 세대의 막내이자 N포세대의 큰형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부모보다 잘 될 가능성이 낮은 첫 세대였다. 내가 용은 되지 못해도 개천을 벗어난 것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MZ세대가 등장하며 N포세대라는 말 자체가 자취를 감췄다. 기자를 제외한 사람들이 진저리치는 ‘그 놈의 MZ’는  ‘N포’가 함의한 절망을 숨겼다. 아니, 어린 세대가 미래를 포기하는 것은 더 이상 유표적 현상이 아니라 상식이 되어버린 증표였는지도 모른다. 미래를 지켜주던 대학 간판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알지만 10대는 여전히 대입에 10대를 통째로 갈아 넣었다. 10년 후, 10대가 사회에 나갈 때쯤 강산은 내 10년보다 더, 더, 더, 극적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챗GPT 때문에.

사진 KBS 관련뉴스 화면캡쳐
사진 KBS 관련뉴스 화면캡쳐

나와 내 윗세대는 운이 좋다. 우리 밥벌이가 챗GPT 영향을 받을 때쯤이면 어차피 은퇴할 시점이다. 나는 좀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연금 나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볼 만하다. 내 아랫세대도 당장은 실직할 리 없다. 오히려 챗GPT 도입 초기 사용자로서 시장 지배자가 될 가능성이라도 있다. 더 아랫세대는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10대는 확실하다. 챗GPT와 경쟁해야 한다. 결과가 정해진 경쟁이다. 아니, 경쟁할 자리가 남아 있기나 할지 모르겠다.

2002년생도 10대가 아닌 2023년, ‘꿈은 이루어진다.’는 이미 전설이 되었다. 운을 노력으로 위장하던 ‘1만 시간의 법칙’이나 ‘시크릿 법칙’도 수명을 다했다. 우리의 1만 시간 노력을 인공지능이 몇 초면 누적하는 시대에, 직업으로 표상되는 꿈은 더 이상 '이루느냐 마느냐는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그 직업의 존재 유무가 불확실해졌다. 챗GPT 등장 이후 많은 전문가들의 생각은 ‘미래는 나도 모르겠다.’로 귀결되었다. 산술급수가 아니라 기하급수의 속도로 내달리는 딥러닝 세계에서 10년은 까마득한 세기였기에 겸손한 고견이었다.

미래 포식자. 10대가 무엇을 꿈꾸든, 인공지능은 그들이 닿기 전에 미래를 먹어 치우고 말 것이다. 그림, 코딩, 언어 등 여러 영역에서 ‘그게 된다고?’가 일상이 되는 중이다. 의사는 인공지능 영향을 덜 받는 직업군 중 하나로 예상되므로 인재가 의대로 몰리는 것은 합리적이다. 인공지능으로 일상이 바뀌지 않았다면, 이미 합리적으로 뒤쳐진 것이다. 혹은 아직까지는 운이 좋을 뿐이다.

미래 피식자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마른 오징어도 쥐어짜면 물이 나온다는 서늘한 농담을 실현할 것처럼 자기착취에 최선을 다한다. 시험 끝나면 수행이고, 수행 끝나면 시험인 챗바퀴는 우리 세대의 혹사를 초월했다. 일상에서 챗GPT를 활용하고, 독서로 통합적 사고력을 함양하며 질문하는 능력을 키우는 대안이 제시되지만 이 대안의 실질 영향력은 미지수다. 그럼에도 살던 대로 살면 확실히 실패하므로 나름의 대안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의치한’이나 ‘SKY’가 아닌 다음에야 선행학습은 높은 확률로 ‘해도 안 된다’를 강력하게 선행하게 될 뿐이다.

내가 이 시대의 10대가 아님에 안도한다. 요컨대 우리 부모님 세대는 노력을 성과로 보상 받으며 정년 안에서 미래를 적당히 예측하고 설계할 수 있었고, 내 세대부터는 불확실성이 높아지긴 했지만, ‘꿈은 이루어진다.’에 속아볼 여지는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10대는 무엇을 꿈꾸든, 그 꿈은 실패할 기회조차 못 가진 채 사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장래’와 ‘희망’이 병치되던 낭만의 장례식에서 관 뚜껑을 열었을 때, 죽은 낭만의 표정은 어떨까? 내 알 바 아니지만, 내 학생의 일이므로 내 숙제다.

그런데 모르겠다. 해도 되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많아지지만, 하고 싶은 것이 허락되지 않는 시대의 성인이 될 10대는 대체 뭘 준비해야 할까? 나름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춰주는 선생이라 자부하고 살았는데, 다른 전문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챗GPT의 활용과 독서를 강조할 뿐이다. 새 시대가 내 밥벌이에 도움이 될 것에 안도하면서, 그리나 언젠가 인공지능에게 내 밥벌이를 빼앗길 것을 예감하면서.

어쩌면 지금의 10대들은 미래 포식자의 입맛 테스터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도 살아보지 못한 시대, 절대다수가 희생될 것이 뻔한 시대, 불확실성이 어느 시대보다 높은 것만 확실한 시대, 부모의 부에 기반한 문화를 누리다가 점점 등급을 낮춰가야 하는 세대는 살아남기 위해서 일단은 모두 준비하는 수밖에 없다.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너덜너덜 열심히 살고 있고, 확정된 패배에게 바치는 우직한 자기공양은 살풍경하고, 측은하다.

꿈을 가지라는 말은 못하겠다. 이제는 아름답고 진취적인 위선이다. 너희가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을 기억하되, ‘중요한 건 꺾여도 계속하는 습관’을 되새겼으면 좋겠다. 세상의 변화 속도를 개별 인간이 따라잡기 힘든 시대, 인간에게 인간이 필요 없는 시대, 너희는 반드시 몇 번이고 꺾이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꺾이면 안 되는 성장주의 신화를 살아온 나와 부모님 세대의 파이팅을 무시하길 바란다. 초연결사회에서 타인의 승인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너희 세대의 문법도 무시하길 바란다. 무엇보다도 내가 틀렸기를 바란다.

그래서 어쩌라고. 뭐라 결말을 지어야 할 텐데,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며칠을 고민해 봐도 모르겠다. 다만, 비합리적 낙관으로 너희가 돈키호테가 되도록 방치하지는 말아야겠다. 사교육은 공포를 희망으로 포장해야 상품이 되지만, 나는 공포를 제련하는 솜씨가 썩 좋은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시대를 일러줄 것이니, 일해라, 자기주도성, 합리적 낙관은 네 몫이다. 미래를 그리는 인공지능으로 나를 활용해라. 그것이 네 살 길이고, 아직은 내가 챗GPT보다는 나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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