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의 복지부동한 실태를 비판하는 기사가 뜨면 예외 없이 이런 댓글이 달린다.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 받으면서 어찌나 불친절한지 상전이 따로 없더라', '하는 일도 없으면서 국민 세금 갈취하는 공무원들은 다 잘라야 한다' 예전 같으면 사람 밥줄 끊으라는 말을 쉽게도 한다며 혀를 찼겠지만, 요즘은 저런 댓글이 일부나마 공감되니 놀라운 일이다.

예전엔 몰랐다. 부모님이 세금에 왜 그렇게 질색하는지. 국민이라면 당연히 내는 거고, 정부가 어련히 잘 사용할 거라 믿었다. 철없는 마음에 '그 돈 없다고 우리 가족이 굶는 것도 아닌데...' 생각한 적도 있다. 내가 번 돈으로 소득세와 지방세를 낸 지 거의 10년이 가까워진 지금은 그때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한다. 아, 남의 돈 벌어먹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어서 그러셨구나. 엄청 아깝네.

피땀눈물 흘려가며 번 돈을 손에 쥐기도 전에 징수당하니, 그 돈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한 게 당연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피땀눈물 흘리며 생업에 종사하느라 내가 낸 세금이 어디에서 사용되는지 감시할 여유가 없다. 공공기관 직원을 보며 '세금 도둑'이라고 욕하는 레퍼토리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다. 공공서비스를 직접 이용할 때에야 비로소 내가 낸 세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으므로 보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게 되는 것이다.

세금을 내는 국민으로서 공공서비스의 질을 논하는 건 정당한 권리다. 소득이 적어 과세대상이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다. 사기업이 제품과 서비스를 구입하는 고객 덕에 존재한다면, 공공기관은 공공서비스를 이용하는 국민 덕에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 기관은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이 아님에도 난 민원인들에게 친절하려 노력한다. 다소 억지 주장을 하더라도 사는 데 바빠 마음에 여유가 없으신가 보다, 잘 모를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간다. 그게 공공기관 직원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에티듀드라고 생각한다.

사진 울산북구 유튜브 영상화면 캡쳐
사진 울산북구 유튜브 영상화면 캡쳐

그러나 이런 생각이 흔들리는 순간도 자주 찾아온다. 나를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상하관계로 대하는 민원인을 만날 때다. 이런 사람들은 은행이나 병원에서 들었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일상적인 말투도 공공기관에서 들으면 불쾌해한다. '내가 엉뚱한 곳에 찾아와 엉뚱한 요청을 했지만 부당한 건 어떻게든 해결방법을 찾지 않는 너희들이야'라는 기적의 논리를 펼친다. 기관명이 다르든 법으로 역할이 나뉘어 있든 알 바 아니다. 어차피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건 같으니 내겐 다 같은 공노비일 뿐이다.

이런 사람을 만났을 때 공공기관에 속한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논리나 설득은 동등한 관계일 때만 가능하다. 자신을 공공기관 직원들의 밥그릇을 채워주는 주인으로 착각하는 민원인에겐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 주종관계에선 무조건적인 복종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상대방의 세계관을 수용하지 않는 것이 전부다. 세상은 각자 역할이 다를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걸 잊지 않는 것 말이다. 그래야 구시대를 살고 있는 민원인이 나의 감정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걸 막을 수 있다. 갑질은 갑과 을이 나뉘어 있을 때만 할 수 있다. 내 앞에서 폭언하는 이 사람을 갑이 아니라 그저 무례한 사람으로 규정한다면, 마음이 힘든 건 어쩔 수 없어도 내 속살은 지킬 수 있다.

공공기관 직원은 당연히 친절해야 한다. '친절'이란 내가 맡은 책무를 힘닿는 데까지 수행하는 걸 의미한다. 규정에 따라, 태만하지 않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걸 뜻한다. 인신공격을 받아도 웃고, 잘못된 요구도 어떻게든 들어주는 건 친절이 아니다. 앞으로 우리 모두가 힘들 다해 개선해야 할 병폐일 뿐이다. 그러니 내일도 난 친절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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