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경의 현대인의 고전읽기] 헨리크 입센 (Et dukkehjem)

남편에게 인사청탁을 하는 간 큰 아내

여기 은행장으로 막 부임한 한 남자가 있다. 그에게는 아내와 세 명의 자녀가 있다. 그는 은행장이 되자 직원 1명을 해고하려 한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가 부탁한다.

“그를 해고하지 말아주세요.”

남편은 의아해서 묻는다.

“왜?”

아내는 뚜렷한 이유를 말하지 않고, 그 직원을 해고하지 말고, 대신 다른 직원을 아무나 한 명 ‘짤르라’고 간청한다.

이러한 상황은 터무니없다. 남편의 직장 업무에 대해 아내가 왈가왈부하는 것, 분명하고 합리적인 이유를 말하지 않는 것, 희생양을 만들라는 것... 더구나 아내가 그러한 요구를 한 것은 21세기도 아니요, 20세기도 아니요, 19세기인 1879년이다. 엄격한 가부장 시대에 아내가 그런 요구를 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 놀랍고, 황당한 일이다. 그러나 144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러한 상황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1879년은 청(淸)나라의 광서(光緖) 5년, 일본은 메이지 천황 12년, 베트남은 응우옌 왕조(阮朝) 32년이었고, 우리나라는 고종 16년이었다. 일본과 제물포조약(1882년)을 맺기 3년 전이었다. 미국 대통령은 제19대 러더포드 헤이스(Rutherford B. Hayes, 1877~1881)라는 사람이었는데 남북전쟁에 참전한 북군 출신이었다. 영국은 빅토리아(Victoria) 여왕이 통치했으며, 러시아는 로마노프왕조의 알렉산드르 2세가 다스렸다. 이러한 시기에 여성이 어떤 발언권을 가진다거나, 자아를 실천한다거나, 독립된 인간으로 살아가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런데 은행장의 아내는 얼마나 배포가 컸는지 이른바 ‘베갯머리 송사’까지는 아니라 해도 남편을 붙잡고 인사청탁을 넣은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당하면 남자들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 1973년 제작된 영화의 한 장면. 노라가 크로그시타의 협박편지로 인해 매우 당황해하고 있다.
* 1973년 제작된 영화의 한 장면. 노라가 크로그시타의 협박편지로 인해 매우 당황해하고 있다.

아버지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헌신적인 아내

노라(Nora Helmer)가 남편 토르발에게 크로그시타를 해고하지 말라고 간청한 이유는 그에게서 1,200탈러(Thaler 유럽의 은화), 즉 4,800크로네를 남편 몰래 빌렸기 때문이다. 크로네(krone)는 노르웨이 화폐단위로 2023년 7월 현재 약 584,000원이다. 노라가 그 돈을 빌린 이유는 남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노르웨이보다 따뜻한 남쪽 이탈리아로 떠나 그곳에서 요양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 요양비와 생활비를 크로그시타에게서 빌린 것이다. 1년 동안 머물렀으므로 최소한 (현재 시세로) 3천만 원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편 토르발에게는 친정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준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노라는 그 돈을 조금씩 갚아나갔다.

그런데 토르발이 은행장으로 부임하면서 크로그시타를 해고하려 하자 노라에게 찾아와 부탁한다.

“제가 은행에서 유지하고 있는 자리가 계속되도록 힘을 좀 써 주십시오”

라고 부탁하면서 그렇게 되지 못하면 차용증서를 공개하겠다고 협박한다. 차용증서 공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문서에 서명한 사람은 아버지였고, 서명 날짜는 10월 2일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9월 29일에 사망했다. 즉 노라가 위조 서명을 한 것이다. 남편을 살리기 위해 서명을 위조하고, 4,800크로네를 받아 요양을 떠났고, 결국 남편을 살려냈다. 그러므로 자신은 선한 일을 한 것이기 때문에 서명을 위조한 것은 법률적으로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크로그시타는 간단하게 일러준다.

“법률이란 동기를 묻지 않습니다.”

노라는 즉각 그 말을 반박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쁜 법률이겠지요.”

크로그시타 역시 지지 않는다.

“나쁘고 좋고 간에------만일 제가 이 종이쪽지를 법원에 제시하면 부인께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노라는 항변한다.

“그렇게 생각되지 않아요. 딸이, 병으로 누워 계신 늙은 아버지로 하여금 걱정과 근심을 덜게 해드릴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건가요? 아내가 자기 남편의 생명을 구할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건가요?”

그녀의 항변은 이해가 가고 공감도 된다. 아버지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헌신적인 아내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로그시타의 입장도 매우 급박하다. 그는 홀로 자녀들을 키우면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나는 지금 파선당해서 한 장의 송판에 의지한 조난자인 것입니다.”

그 조난자를 구해내고, 노라의 가정이 행복을 쭈욱--- 유지하기 위한 해결책은 아주 간단하다. 크로그시타가 계속 은행에서 일할 수 있도록 노라의 남편 토르발이 결단을 내리면 된다. 그러나 토르발은 이러한 사실을 까마득히 모를뿐더러 매우 공정하고 도덕적인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란 여자’라는 오해를 받고 있는, 그래서 그러한 인식이 매우 역겨운 노라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성해방 vs. 가정파괴, 누구의 말이 옳은가?

1940년대에 만들어진 서구 영화를 보면 술집이나 식당, 카페에 앉아 술을 마시고, 담소를 나누고, 식사를 하고,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의 99%는 남자이다. 서빙을 하는 사람조차 콧수염을 기른 남자이다. 심지어 1960년대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은 종종 나온다. 여자는 집밖으로 나와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여성에게 일반적으로 평등한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1893년 뉴질랜드를 시초로 본다. 호주는 1902년, 핀란드는 1906년, 노르웨이는 1913년, 미국은 1920년, 영국은 1928년, 프랑스는 1944년, 일본은 1945년, 스위스는 1971년, 쿠웨이트는 2005년부터 여성이 투표를 할 수 있었다. 가장 늦게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로 2015년이다.

여성에게 투표권을 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성이 투표를 하면 투표하는 숫자만 2배로 늘어날 뿐이다”라고 반대했다. 남편을 따라서 투표하기 때문에 숫자만 늘어날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과 상황이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성 선각자들의 투쟁이 아니었다면 위의 숫자는 더 뒤로 미뤄졌을 것이다.

노라는 여성 선각자였을까? 희곡 <인형의 집>이 발표된 1879년은 어쩌면 ‘선거권’(suffrage, right of voting)이라는 단어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 시기에 노라는 집을 뛰쳐나가 독립하겠다고 선언한다. 크로그시타의 협박과 노라의 위조 행위를 토르발이 알게 되지만 다행히 크로그시타는 차용증서를 찢어버리고 새 출발을 선택한다. 모든 일이 평안하게 마무리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 노라는 자기자신을 찾겠다고 청천벽력 같은 선언을 한 것이다. 돈도 없고, 집도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없는 노라가 과연 자신의 진정한 삶을 찾을 수 있을까?

<인형의 집>은 1879년 12월 21일 코펜하겐 왕립극장에서 첫 공연된 이후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한쪽에서는 ‘여성해방의 바이블’이라고 갈채를 보냈고, 한쪽에서는 ‘결혼의 고귀성과 가정을 파괴하는 불순한 작품’이라고(김양순, 범한출판사) 비난했다.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지는 아직까지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다.

더 알아두기

1. 헨리크 요한 입센(Henrik Johan Ibsen 1828~1906)은 노르웨이의 극작가로 문학사에 길이 남을 여러 작품을 발표했으나 노벨문학상은 받지 못했다. 톨스토이, 에밀 졸라와 더불어 왜 받지 못했는지 논란이 되는 작가이다.

2. <인형의 집>(A Doll's House)은 한국에서는 1925년 조선배우학교에서 첫 공연되었다.

3. 입센의 육필원고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되어 노르웨이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최초의 원고에는 ‘현대의 비극에 관한 주석’(Notes on the Tragedy of the Present Age)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즉 입센은 이 작품을 ‘현대의 비극’이라는 관점에서 집필했으며, ‘여성해방이나 여성의 자아찾기’는 고려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4. 입센은 1867년 <페르귄트>(Peer Gynt)라는 극을 썼다. 상상과 현실을 종횡무진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는데, 1875년 에드바르 그리그(Edvard Grieg)가 <페르귄트 모음곡>을 완성했다. 가장 유명한 곡은 ‘솔베이지의 노래’(Solveig's Lied)이다.

5. 유튜브에서 1973년작 영화를 무료로 볼 수 있다. 실내에서만 진행되기 때문에 다소 답답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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