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ism)이 증발한 시대의 갈등들

사진 MBC 관련뉴스 화면 캡쳐
사진 MBC 관련뉴스 화면 캡쳐

지난 6월 러시아에서 바그너 용병이 벌인 반란은 ‘한 여름 밤의 꿈’처럼 너무 빨리 잠잠해져 놀라웠다. 반란군이 모스크바로부터 200㎞까지 접근해서 나폴레옹이나 히틀러 군대의 러시아 침략을 떠올리게 했던 사건치고는 너무 쉽게 진정돼서다.

그럼에도 21세기에 세계 매스컴을 요란하게 장식한 ‘용병’이란 말의 여운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기 어렵다. 특히 한국인들의 경우는 그렇다.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에게 러시아는 ‘공산국가’ 같은 존재다. 6.25의 후유증 때문이리라. 그래서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냉전시대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이념(-ism)의 대결로 보는 이들이 많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도한 한국 언론의 댓글에서는 러시아를 비난하는 ‘좌빨’이라는 말이 홍수를 이룬다.

더욱이 최근 들어 극동에서 한·미·일 3국과 러시아 중국 북한의 3국이 대결하는 구도가 비치자 3차 대전이라도 터질 것 같던 분위기가 감돌기도 했다.

그런 공산국가에서 ‘용병’이라니 놀라울 수밖에. 용병은 공산국가가 출현하기 이전, 아니 자본주의 국가도 등장하기 전의 전제군주 시대에나 볼 수 있었던 존재가 아닌가.

용병이라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프랑스 혁명 당시 튈르리 궁전에서 루이 16세를 경호하던 스위스 용병이다. 그들이 1792년 군중이 몰려오자 이들을 저지하려다 768명 전원이 전사한 것은 험상궂은 용병의 역사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드라마 같아서 조각 작품으로도 남아있다.

그런 용병의 나라 스위스에서도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로마교황청을 경호해온 용병들뿐이고 그들도 이제는 ‘용병’이 아니라 ‘근위대’로 불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좌와 우의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보는 이들에게는 바그너 용병의 반란 직전인 5월의 튀르키예 대선에서도 이상한 경험을 했다.

그 선거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결선에서 승리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다. 세계의 매스컴이 합창을 하듯 ‘극 보수파’ 또는 ‘극우파’인 에르도안이 승리하자 러시아가 쾌재를 부르고 미국이 충격을 받았다는 식으로 보도를 했던 것이다.

그것은 우크라이나 보도에 등장하는 ‘좌빨’ 댓글의 공식과 정반대가 아닌가?

물론 그런 댓글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냉전시대의 좌우 대결과 결부시켜서 보는 데서 비롯된 착각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그런 착각을 일으킬만한 요건도 갖추고 있다. 우선 냉전시대 서방의 십자군 같은 존재인 ‘나토’가 등장하고 그 상대역에는 러시아로 이름이 바뀐 소련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러시아 쪽에는 냉전시대 나토의 상대역인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없다. 아니 바로 ‘바르샤바’가 거꾸로 나토의 전진기지 구실을 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푸틴 자체도 공산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소련 말기에 그 유명한 정보기관 KGB에 근무했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반공적인 활동을 폈고 2000년 대통령에 당선될 때도 공산당 후보인 겐나디 주가노프와 대결해서 승리했던 것이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서방에서 푸틴을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푸틴을 악평하는 경우에도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공산주의 혁명에 몰락한 제정러시아의 ‘짜르’라는 비아냥 정도였다.

반면 유럽의 보수우파 사이에서는 푸틴을 새로운 희망으로 보는 시각마저 없지 않았었다.

그러다 2021년 10월21일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18회 발다이 포럼에서 행한 푸틴의 연설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과 그 이념을 추종하는 서구의 좌파를 통박했다.

서구의 좌파 지식인들의 주장이란 게 구소련이 쓰다 망한 이념일 뿐이라는 그의 주장은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일변시킬만한 일이었으나 그 연설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실은 한·미·일과 북·중·러가 마주치고 있는 극동의 상황도 자세히 살피면 냉전시대의 이념적 대결과는 거리가 멀다.

얼핏 지난날의 공산주의 대국인 러시아와 중국이 연합한 모양새지만 그 두 나라는 베트남 전쟁이 치열했던 냉전시대의 정점에서도 서로 총포를 쏘며 전쟁을 벌였던 사이다. 그 직후에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밀월을 즐겨 소련의 붕괴에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따라서 오늘날 서방 세력이 러시아를 적대하는 것은 공산주의와 무관하게, 즉 볼셰비키 혁명 이전부터 서구인들이 러시아에 대해 원천적으로 지니고 있던 혐오감이랄까 공포증을 말하는 ‘루소 포비아’의 발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도 좌와 우의 이데올로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외형상 자본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여서 이데올로기 대결의 모양새는 갖추고 있으나 거기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무역 갈등’이라는 소리가 주류다.

바꾸어 말하면 두 나라가 이데올로기적 적대감 때문에 서로 거리를 두고 대결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너무 긴밀하게 무역으로 얽혀 있던 결과가 미국 경제에 경종을 울린 셈이다.

그러고 보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즘이 증발한 시대의 세계대전이라 할 수 있다.

세계가 이즘을 상실한 것은 오래 전부터였으나 이념 갈등도 없이 세계 대전 규모로 벌어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새삼 그 모습이 드러난 셈이다.

바로 바그너 용병도 오래 전부터 아프리카에서 활략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새삼 그 존재가 세계의 눈길을 끌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유라시아 대륙의 북부를 벗어나면 어느 곳에서도 이데올로기의 대결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냉전시대의 세계 풍경과는 딴판이다. 당시의 세계는 동서 양 진영은 말할 것 없고 그 밖의 지역에서도 치열한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심지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용명과 악명을 떨친 바그너 용병들이 활략하고 있는 아프리카에서도 이념적 대결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 바그너 용병마저 얼씬거리지 않는 중남미는 더욱 조용하다.

중남미가 원래 그런 이데올로기 갈등으로부터 초연한 곳이어 서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공산주의 혁명의 영원한 아이콘인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를 배출한 중남미는 지난날 격심한 이념 갈등을 겪었다.

그 가운데는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도 있었다. 1962년 10월 쿠바에 소련이 미사일 기지를 건립하려 하자 미국이 이를 막는 과정은 냉전시절을 통 털어 3차 대전의 공포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순간이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해 그곳에 설치되는 미사일 기지가 러시아의 심장인 모스크바를 겨누는 것이 쿠바의 소련 미사일 기지가 뉴욕이나 워싱턴을 겨누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게 러시아 측을 옹호하는 편의 주장이다.

그랬던 남미에서도 이제는 별다른 이념 갈등은 비치지 않고 있다. 그곳에서도 자주 화약 냄새를 풍기는 사건들은 벌어지고 있으나 그것은 고작 마약 카르텔들의 싸움이 주류다.

그래서 미 중 러 등 강대국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도움을 받기 위해서건 그걸 떠나 자체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건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갖 수다를 떨고 있으나 거기에서 무슨 이데올로기적인 발언을 찾아 볼 수는 없다.

따라서 20세기의 냉전시절에는 구미 외외 지역을 방문하던 동서방의 지도자들이 자기편의 국가들만을 방문해 단결을 다지는 것과는 달리 오늘날 아프리카로 달려가는 동서방의 지도자들은 상대편이 거쳐 간 국가를 뒤쫓아 가서 나름의 회유책을 던지고 있으니 마치 선거 유세를 하는듯한 모양새다.

그렇다면 이즘이 증발한 세계는 평화로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말해주고 있다.

그뿐 아니다. ‘이즘’이라고 부르기에는 뭐하지만 ‘인종주의’라는 이데올로기도 있다. ‘인종차별’로도 불리고 ‘인종차별주의’로도 불린다.

물론 그런 ‘이즘’을 설파하기 위해 ‘자본론’ 같은 이론이 나올 턱이 없다. 인종차별은 야만인들이라도 갖기 마련인 본능적인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런 인종갈등이 지난날의 이데올로기를 대체하듯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는 게 문제다.

사진 SBS 관련뉴스 화면캡쳐
사진 SBS 관련뉴스 화면캡쳐

지난 6월27일 파리 근교에서 알제리-모로코계 프랑스 시민인 17세 소년 나엘이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함으로써 벌어진 격심한 폭력시위는 이제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낯설은 사건이 아니다.

프랑스에서 유태인 장교 드레퓌스가 인종차별로 억울한 죄인이 되려하자 작가 에밀 졸라가 1898년 1월 13일 신문 로로르(L'Aurore, 여명)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제목으로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기고했던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는 이제 까마득한 옛일 같은 느낌마저 준다.

물론 미국에서도 그런 현상은 뒤지지 않는다. 아니, 인종차별로 남북전쟁을 치르고 그것이 인종차별단체인 KKK의 출현으로 이어졌던 인종차별의 본마당이 그 옛날의 모습을 되찾는 느낌마저 주고 있다.

트럼프가 인종주의 바람으로 대선에서 힐러리를 이겼다는 설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분석이다. 그는 전임의 흑인 대통령까지 들먹이며 인종주의를 설파했던 것이다.

트럼프 현상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이전의 공화당은 인종주의적 발언을 위험시했으나 트럼프는 이를 노골적으로 들먹임으로써 더 힘을 얻는 점이다.

그 모든 현상은 교통의 발달로 인종간의 교류, 즉 세계화가 더 활발해진 데 따른 부작용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의 증발로 인종차별이 더 거리낌 없이 성행하는 측면도 있다. 예를 들어 1866년 KKK가 발족하기 2년 전인 1864년에는 공산주의자들의 대중조직인 제1차 인터내셔널이 결성돼 국제공산주의운동이 시작됐다.

그로부터 시작된 이데올로기의 각축 속에서 인종차별주의는 이즘으로써의 간판도 내밀지 못한 채 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제 세상을 만난 듯한 느낌이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