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유난히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다. 다툰 것도 아닌데 괜히 밉다. 모두가 나와 맞을 순 없다고 마음을 다잡아도 여전히 밉다. 그 사람의 표정과 말투, 밥 먹을 때 내는 소리까지 신경 쓰인다. TV를 보다가도 갑자기 떠올라 기분이 안 좋아지고, 그 사람 때문에 내 저녁시간을 망쳤다는 생각에 다시 스트레스를 받는다.

대민업무를 시작하고 나의 일상이 저랬다. 상대방이 쉽게 뱉은 말 한마디, 못마땅한 표정, 손가락 끝으로 민원대를 딱딱 치던 소리가 생각나 시도 때도 없이 얼굴에 열이 오르곤 했다. 진상 민원인이 없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말은 점점 공격적으로 느껴졌고, 퇴근 후에도 방어논리를 만드느라 머리가 쉬질 못했다. 모든 민원인이 나를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사진 KBS 관련뉴스 화면캡쳐
사진 KBS 관련뉴스 화면캡쳐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연세가 지긋한 민원인의 항의전화를 받으며 동기에게 인류애를 상실하고 있다는 메신저를 보내던 중이었다. 그때였다. 하루에도 열 번 넘게 듣던 문장이 갑자기 낯설게 들렸다. "나라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분은 나한테 화가 난 게 아니구나. 저 밖에서 쌓인 울분을 풀 곳이 없어 눈앞에 보이는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는 거구나. 하지만 나는 공공기관 직원이지 이 분이 말하는 "나라"는 아닌데...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꼴 되지 말고 비켜 서 있어야겠다.

그때부터 내 직장생활은 한결 편해졌다. 민원인의 분노가 나를 향한 것이라는 강박을 버린 덕이었다. 대응방식도 바꿨다. 내 입은 논리적인 문장 대신 이런저런 추임새를 뱉기 시작했다. 어이구. 그러셨어요. 그렇죠. 너무 힘드셨겠어요. 어떨 땐 대통령을 욕하는 민원인을 거들기도 했다. 왜 정책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나도 이해할 수가 없다며, 기회가 된다면 당장 뜯어고치라 전달하겠다고 했다.

어떤 분들은 나의 유체이탈 화법을 보며 공공기관 직원으로서 책임감이 부족하다 할지 모른다. 그 말이 맞다. 난 조직보다 내가 먼저다. 우리 기관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만 나는 먹고살기 위해 일한다. 내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저분이 말하는 "나라"를 대신해 욕받이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내가 한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민원 현장에선 담당자인 나조차 이해되지 않는 제도가 수없이 목격된다. 그래서 조사 부서에 발령 났을 땐 내가 비판했던 제도의 개선을 위해 열심히 보고서를 썼다. 실제로 정책개선까지 이어진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하는 데까지 했다고 느낄 때까지 키보드를 쳤다. 그 덕에 부끄러움 없이 회사와 나를 분리시킬 수 있었고, 이는 민원인을 달래면서 동시에 내 마음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미운 감정을 없애는 방법은 두 가지다. 상대를 이해하거나, 의미를 두지 않는 것. 평생 같이 사는 가족도 이해하기 어려운 판에 잠깐의 대화로 이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난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내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이 분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니 화가 풀릴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면 그만이다. 퇴근 뒤엔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사람을 미워하느라 하루를 망치기 싫다. 그러니 이 사람이 옳은지 틀렸는지는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비스듬히 서서 회사를 다니다가 지금보다 마음이 조금 더 두꺼워지면 이 무례한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보려 한다. <위대한 개츠비>의 문장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나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던 건 아니다. 나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덕에 듣기 좋은 문장들을 선택하며 말해왔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주변에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 없던 탓에 자기가 그러는지도 모르고 미운 말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니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는다. 옥상에 올라가 욕을 한두 마디 아니 서너 마디 할 순 있겠지만 그뿐이다. 당신을 나쁜 사람이라 재단하기엔 우리의 만남은 너무 짧았다. 당신도 그러길 바란다. 눈앞에 있는 한낱 개인에게 분노를 쏟는 대신 상처 주지 않고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을 배우길 바란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세상은 조금 더 나아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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