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친목단체인 관훈클럽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매달 한 번씩 열리는 모임 중에 영시공부모임이 있다. 이 모임은 창립 9주년을 맞아 6월 13일 문학평론가 구중서 씨를 초청하여 ‘이니스프리와 향수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특강을 가졌다.

강연은 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암 예이츠의 ‘호수의 섬 이니스프리’와 정지용의 ‘향수’에 담긴 서정의 의미를 비교하는 것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시인들이 자연을 예찬하는 서정을 읊었고, 예이츠와 정지용은 최소한 그들이 태어난 나라를 대표하는 서정 시인이다.

김희갑이 작곡하고 박인수와 이동원이 부른 가요 ‘향수’가 나오기 전까지 나는 정지용의 시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교과서에서 그의 시를 접할 수 없었던 것이 그가 월북시인으로 낙인 받은 것에 기인한 것을 안 것은 그의 작품들이 해금된 198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사진 논객닷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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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의 첫 연(聯)의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에서 나는 집 앞의 개천이 들판을 휘돌아 서해로 빠지는 고향의 풍경을 연상했지만, ‘옛이야기 지줄대는’이라는 대목은 정지용의 귀와 눈으로만 감각할 수 있었던 풍경이리라.

얼룩배기 황소의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이나, 질화로의 식은 재, 늙으신 아버지가 돋아 고이던 짚베개 등도, 7080 이후세대의 기억에 더러 남아있을 옛 고향의 정취들로, 정지용이 찾아낸 주옥같은 시어(詩語)들이다.

예이츠는 ‘이니스프리’에서 “‘외 얽고 진흙 바른 오두막집’ ‘아홉 이랑의 콩밭과 벌집 한 통’ ‘아침엔 귀뚜라미 저녁엔 방울새 나래소리가 들리고, 호수의 파도소리가 들리는 평화로운 곳으로’ ‘나 이제 일어나 이니스프리로 가리라’”고 읊고 있다.

예이츠의 서정이 매우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것에 비해 정지용의 서정에는 상징과 은유가 더 짙게 배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향수의 네 번째 연에서 정지용은 아내에 대한 연민인지 회한인지 모를 정경을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시어로 묘사하고 있다.

학력이나 외모에 대한 묘사로 보이는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아내가, ‘사철 발 벗고,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으로, 가난에 찌든 삶의 모습 속에 아내를 등치(等置)시킨 것이다.

필자는 향수의 제4연이 다른 연의 주옥같은 시어들보다 정지용의 인간미가 살아있는 진실되고, 힘이 있는 구절이라고 여겨왔다. 작곡가도 그래서인지 이 구간을 노래에서 가장 부르기 어려운 최고음 구간으로 처리했다.

이날 연사로 초청된 문학평론가 구중서 씨는 이에 대해 다소 다른 견해를 밝혔다. 아내를 대수롭지 않게 묘사한 것은 그 시대 남성들의 자식 자랑, 아내 자랑을 팔불출(八不出)로 여긴 겸비(謙卑)정신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1902년 생인 정지용은 11세 때인 1913년 동갑내기인 송재숙과 결혼했고 향수는 일본 유학시절인 1927년에 발표되었다. 원래 이 시를 쓴 것은 이보다 4년 앞선 1923년 그가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동지사 대학에 유학을 갈 무렵이라는 설도 있다.

1920년대 초라면 그의 아내 역시 20대 초반으로 시집살이의 고단함은 있었으되 새댁 티를 벗지 않았을 나이이다. 그러므로 4연에서의 아내는 자신의 아내를 넘어, 한국의 아낙, 한국의 농촌, 나아가 식민지 조국의 곤고한 형상을 묘사하기 위해 동원된 상징어일 수도 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장학생으로 휘문고보에 진학했고, 동지사 대학 유학도 장학생이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그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휘문고보에서 교사를 하면서 많은 문우(文友)들과 어울려 문단활동에 정열을 쏟을 때 그의 호주머니에 가정을 돌볼 여유가 남아있을 날이 없었으리라.

그가 1950년 6.25 동란으로 서울에서 납북인지 월북인지 모르게 실종된 이후 1980년대 해금될 때까지 남한에서 그의 작품들은 금서였다. 월북작가의 아내로, 3남1녀의 어머니로 그녀의 일생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는 미루어 짐작되는 일이다. 그것은 더러 유족들의 증언에서도 묻어난다.

향수의 4연은 그같이 그의 아내가 걷게 될 형극의 길을 짐작을 하고 미리 읊은 사처곡(思妻曲)인지도 모른다. 모임의 뒷풀이 장소에서 나는 이왕 얘기를 꺼낸 김에 ‘향수’를 불러보라는 주위의 제청을 받고 엉겹결에 일어서서, 노래방을 잊고 산지 3년 만에 마이크도 없이 목청껏 불렀다. 4절의 고음 구간에서 역시 나의 목은 감겼고, 메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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