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목표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이지 사람이 아니다.' - 세스고딘, 린치핀

10년 넘게 조직에 몸을 담고 나서 곱씹어 보니 조사 하나까지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내가 속한 이 조직의 시스템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정부의 재정으로 운영되는 회사에 다니면서 정확한 정의조차 모르는 것 같아 몇 년 전 공공기관의 의미에 대해 찾아본 적이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내가 다니는 회사는 법이 정한 의미의 공공기관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상 공공기관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에, 누가 어느 회사 다니냐고 물어보면 나는 그냥 공공기관 다닌다는 대답을 해왔다. 일단 회사 이름을 말하는 게 싫었고,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부가 설명을 하는 것이 귀찮았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의 시스템이란 사실 별다를 게 없다. 나라가 이미 다 정해줬고 공고히 다져줬기 때문에 그 시스템하에서 본전을 유지하고 관리만 잘하면 그걸로 족하다. 때때로 새로운 정부 정책과 제도의 실험대상이 되거나 본보기를 강요받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수혜 대상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예를 들어 기혼 여성 직원의 경우 출산과 육아휴직에 대해 자유롭게 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기간이 연장되어 법으로 도입되면 가장 먼저 그 혜택을 누리는 곳이 공공기관이다. 모성보호시간(근로시간단축)과 유연근무제 보장도 당연 포함이다. 향후 몇 년 안에 세대 간의 첨예한 갈등으로 부상될 것이라 예상되는 정년연장에 대해서 지금 이 순간 가슴 떨려하는 집단도 공공기관 직원들일 가능성이 크다. 위는 자기들이 곧 누린다는 기대감으로, 아래는 저 한심한 족속들을 몇 년 더 봐야 한다는 끔찍함으로 이래저래 가슴이 떨리는 것이다.

나는 회사를 다니면서 공공기관의 시스템이 지하철 운행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지하철에 몸을 실으면 빨리 가거나 늦게 가는 거 없이 '일정한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뜻밖의 사고가 있지 않은 이상) 내가 타서 내리지만 않으면 거의 모든 것이 예상 가능한 범위 내서 움직여주는 것이다. 단, 난 내 노선과 경로를 함부로 정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바보 같은 나는 지하철을 타놓고 왜 저기로는 못 가나요? 왜 더 빨리 못 가는 거죠?라는 되지도 않는 의문을 품고 티마저 냈으니 승진 누락은 당해도 쌌다. 가만히만 있어도 반은 먹고 들어가고, 중간이상으로 평가받는 곳에서 보통 어리석은 게 아니었다. 이러다 보니 (출근 전 퇴근 후의 각자 성장은 논외로 하고) 공공기관의 9 to 6 안에서 전문성, 변화, 혁신, 자기 발전, 자기 쇄신은 상당히 먼 이야기다. 업무와 시즌에 따라, 부서와 직급에 따라 바쁠 순 있어도 도전이 없는 일을 하며 위의 것들을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비교적 편하게(?) 다닌 직장에서 받은 월급을 부지런히 자산으로 바꾸거나, 나만의 무기 하나를 탑재해야 하는 게 그 어디보다도 필요한 조직인 것 같다. 업무 특성상 다른 조직에서 써먹을 기술이 없고, 기술이라고 말할 만한 실체가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사진 논객닷컴 DB
사진 논객닷컴 DB

공공기관이라는 시스템에 탑승해 넋 놓고 있다가, 내릴 때가 됐을 때 나의 생존력에 대해 거의 매일을 고민한다. 현재 스코어... 빼박 제로에 수렴하다 보니 편한 몸과 정반대로 마음은 늘 지옥이다.

나폴레옹은 "우리가 어느 날 마주칠 재난은 우리가 소홀히 보낸 시간이 보복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인생은 다 가질 수 없고 절대 공짜가 없는 법, 편하게 보낸 시간의 보복도 소홀히 보낸 시간의 보복 못지않을 것이다. 요즘의 내가 퇴근 후에 더 바쁜 이유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난 지하철 타는 걸 싫어해서 지하철보다는 버스를, 버스보다는 자가용을 선호하는 쪽인데, 지하철 시스템에서는 그 누구보다 긴긴 시간 은신하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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