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들꽃여행]

폭염 속에서 피는 ‘백 년의 꽃’, 가시연꽃!

수련과의 한해살이 수초. 학명은 Euryale ferox Salisb.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

경남 양산의 황산생태공원에서 2018년 9월 만난 가시연꽃. 30도를 웃도는 폭염이 이어지면서 5년 만에 다시 꽃을 피울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사진 김인철
경남 양산의 황산생태공원에서 2018년 9월 만난 가시연꽃. 30도를 웃도는 폭염이 이어지면서 5년 만에 다시 꽃을 피울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사진 김인철

모처럼 반가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가시연꽃의 개화 뉴스입니다. 먼저 지난 7월 27일 강릉 경포습지에서 가시연꽃이 폈다는 첫 보도가 있었습니다. 10여 일 뒤인 8월 9일 창원의 주남저수지에서도 가시연꽃이 개화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는 속보가 전해졌습니다. 창원시는 3월부터 경쟁 종의 뿌리 제거 등 꾸준히 복원 작업을 벌여 가시연꽃을 증식하고 꽃을 피웠다고 합니다. 부여 궁남지에서도 가시연꽃 꽃봉오리가 하나둘 보인다고 합니다.

개화의 조건이 극히 까다로워, 100년 만에 한 번 필까 말까 한다는 가시연꽃이 2023년 여름 30도를 웃도는 폭염이 길게 이어지면서 속속 꽃잎을 여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 김인철
@사진 김인철

‘그대에게 행운을’이란 멋진 꽃말의 주인공인 가시연꽃.

하지만 첫인상은 멋지기보다 위압적입니다. 보통 가시연꽃은 자생지의 수면을 뒤덮을 만큼 풍성한 잎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수면에 떠 있는 둥근 잎이 크게는 지름이 무려 2m에 달해, 국내 자생식물 중 가장 크다는 말을 듣습니다. 단순히 크기만 한 게 아니라 잎마다 수십 개의 가시가 듬성듬성 박혀있어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길게는 1cm쯤 되는 가시가 잎은 물론 줄기와 꽃받침, 심지어 열매의 겉에까지 잔뜩 돋아있습니다. ‘가시연꽃’이란 이름을 얻은 연유입니다. 특히 찌를 듯 날카로운 가시가 촘촘히 박힌 창 모양의 꽃봉오리가 가시투성이의 진녹색 자기 잎을 뚫고 솟아난 모습은 한마디로 경이롭다고 할 정도입니다.

보랏빛 꽃잎을 빼고 전초에 가시가 촘촘히 박힌 가시연꽃.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의 여동생으로 머리가 뱀인 괴물 에우리알레(Euryale)가 학명의 속명으로 쓰인 연유가 십분 이해된다. 종소명 페록스(ferox)는 가시가 많다는 뜻이다. @사진 김인철
보랏빛 꽃잎을 빼고 전초에 가시가 촘촘히 박힌 가시연꽃.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의 여동생으로 머리가 뱀인 괴물 에우리알레(Euryale)가 학명의 속명으로 쓰인 연유가 십분 이해된다. 종소명 페록스(ferox)는 가시가 많다는 뜻이다. @사진 김인철
@사진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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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초가 이렇듯 크고 무시무시한 데 반해, 지름 4cm 안팎의 보랏빛 꽃은 보는 이를 한눈에 사로잡을 만큼 매혹적입니다. 완두콩 모양의 씨앗과 더불어 가시 없는 유이(有二)한 부위인 보라색 꽃잎이 반쯤 벌어진 모습을 물 밖 멀리서 뚫어져라 응시하노라면 ‘천국이 바로 여기인가?’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꽃은 오전에 잎을 열었다가 저녁이면 오므리기를 사나흘 되풀이하다 물속으로 내려가 씨앗을 생성합니다. 암술과 수술을 갖춘 꽃봉오리를 열고, 벌·나비를 불러 수정을 하고 열매를 맺어 종족 보존을 하는 일련의 과정은 여느 한해살이풀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에 더해, 가시연꽃은 수심이나 수온, 일조량, 기후 등 개화의 조건이 맞지 않으면 꽃봉오리를 열지 않고, 자가수분에 의해 씨앗을 맺는 폐쇄화(閉鎖花)의 길로 나아가는 결단을 내립니다. 이 때문에 수면 위로 올라온 꽃봉오리를, 신발이 닳도록 찾아간다고 해도 그해에는 정작 꽃 핀 것을 보지 못합니다. 5년 만에 보았느니 10년 만에 겨우 한 번 보았느니 하는 말이 나오는 까닭입니다.

큰 잎에 비해서는 왜소한 지름 4cm 안팎의 꽃. 한여름 파란 하늘 아래 보랏빛 가시연꽃이 피어있는 풍경이 한적하고 여유가 넘친다. 최대 자생지로는 창녕의 우포늪이 꼽힌다. 수도권에선 시흥의 관곡지가 유명하다, 양산의 황산생태공원, 부여의 궁남지, 강릉 경포가시연습지, 경산의 진못 등 전국적으로 20여 곳에서 서식한다.@사진 김인철
큰 잎에 비해서는 왜소한 지름 4cm 안팎의 꽃. 한여름 파란 하늘 아래 보랏빛 가시연꽃이 피어있는 풍경이 한적하고 여유가 넘친다. 최대 자생지로는 창녕의 우포늪이 꼽힌다. 수도권에선 시흥의 관곡지가 유명하다, 양산의 황산생태공원, 부여의 궁남지, 강릉 경포가시연습지, 경산의 진못 등 전국적으로 20여 곳에서 서식한다.@사진 김인철
@사진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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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천이나 계곡이 아니라 못이나, 습지, 늪 등 물이 있는 곳에 주로 서식하는 가시연꽃 생태의 더 큰 신비는 씨앗의 특성에 기인합니다.

가시연꽃은 때가 되면 뿌리도 줄기도 잎도 다 버리고 오로지 씨앗만을 남기는데, 그 씨앗이 쉽게 발아하지도 않고 또 쉽게 썩지도 않는 신비의 생명체이지요. 즉 한두 해 안에 발아가 안 되면 썩는 일반적인 씨앗과 달리 수년이든 수십 년이든 발아력을 유지한 채 땅속에서 쉬고 있는 매토종자(埋土種子)입니다. 휴면 상태에서 때를 기다리던 씨앗이 최적의 조건이 갖춰지면 발아해 뿌리를 내리고 잎을 펼치고 꽃을 피웁니다. 바로 가시연꽃 생태의 신비입니다. 가령 수년 전 강릉 경포호에 갑자기 가시연꽃이 나타나 소동이 벌어진 바 있습니다. 2010년 경포호 배후 습지에서 가시연꽃이 난데없이 나타나 개화한 연원을 추적해 보니 1960년대 농경지 개간 이후 휴면 상태에 있던 가시연꽃의 매토종자가 습지 복원사업으로 생육조건이 맞자 50년 만에 발아한 것이었습니다.

김 인 철
김 인 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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