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경의 현대인의 고전읽기] 막스 뮐러 '독일인의 사랑'

세계적 언어학자(종교학자)의 유일한 소설

소설의 무대 중 한 곳인 오스트리아 티롤
소설의 무대 중 한 곳인 오스트리아 티롤

“성문앞 우물곁에 서있는 보리수/나는 그 그늘아래 단 꿈을 꾸었네/가지에 희망의 말 새기어 놓고서/기쁘나 슬플 때나 찾아온 나무밑”

내 기억에 의하면 고등학교 때 이 노래를 배웠다. 제목은 ‘보리수’(Der Lindenbaum)이다. 선생님은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Die Winterreise)의 5번째 곡이라고 일러주었다. 이 노래가 작곡된 해는 1827년이다. 원래 빌헬름 뮐러(Wilhelm Müller)가 발표한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1816), ‘겨울 여행’(1823) 등의 시를 노래로 만든 것이다. 즉 시가 발표되고 4~10년 후에 노래가 탄생되었다. 빌헬름 뮐러는 독일 데사우에서 태어난 낭만파 서정시인으로 1823년, 29살에 아들 막스 뮐러(Friedrich Max Müller)를 낳았다. 그래서 아들의 고향 역시 데사우이다.

막스 뮐러는 아버지와 달리 시나 소설을 쓰지 않고 언어학, 종교, 문화학을 공부한 뒤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동양고전에 대해 연구했다. 네이버에 소개된 그의 저서들은 <동방성서>, <인도 6파철학>, <종교의 기원과 생성>, <신화학> 등 모두 전문서뿐이다. 그런데 정작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꾸준히 읽히고 있는 책 1권이 빠져 있다. 바로 <독일인의 사랑>(Deutsche Liebe)이다. 심지어 뮐러의 연보에서조차 이 책은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근엄한 종교학자에게 누가 된다고 생각하여 뺀 것일까?

1856년(33세) 간행된 이 책은 뮐러의 유일무이한 소설이다. 발표 이후 167년 동안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읽혀지고 있음에도 큰 오해를 안고 있다. 제목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사랑에 관한 소설’이라 평한다는 점이다. 마치 법정의 <무소유>를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책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책의 독후감이나 평을 보면 “순수하고 아름다운 플라토닉 사랑”, “청춘시절의 풋풋한 첫사랑” 등이 주를 이룬다. 물론 <독일인의 사랑>은 주인공인 나와 마리아라는 여자와의 만남과 헤어짐, 그로 인한 슬픔을 묘사하고 있지만 사랑이 주제가 아니라 신(神)이 주제이다. 당연히 여기에 대해서도 논박이 있겠으나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또 하나, 이 책은 분량이 길지 않으나 읽기가 쉽지 않고, 중간중간 약간 지루할 수 있다. 펜을 들고 밑줄을 쳐가며 읽기를 권한다.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겨울 여행’ 등의 시로 유명한 빌헬름 뮐러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겨울 여행’ 등의 시로 유명한 빌헬름 뮐러

‘신의 뜻’은 어떻게 작용할까?

이 소설은 ‘머리말’에서 시작하여 ‘첫 번째 회상’을 거쳐 ‘마지막 회상’까지 9장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무척 단순하다. 독일의 어느 마을에 사는 ‘나’가 어렸을 때 마리아라는 귀족 여성을 우연히 만나 아슬아슬하게 만남을 이어가다가 그녀가 죽음으로써 젊은 날의 만남이 끝난다는 내용이다. 아슬아슬한 이유는 나는 평민인데 반해 그녀는 귀족인데다가, 나는 건강한 청년임에 반해 그녀는 심장병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소녀였음에도 백작의 지위를 갖고 있었으며 웅장한 성에서 살았다. 나는 7~8살 무렵 학교가 끝나면 그 성에서 어린 공자(公子)들과 함께 놀고 공부도 했다. 어느 날 그곳에 마리아가 나타났다(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주인공보다 서너 살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몸이 너무 허약해 침대의자에 누워서 생활해야 했다. 어느 봄날, 그녀가 아이들이 놀고 있는 방으로 ‘실려와’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내 생일인데, 아침 일찍 견진성사를 받았어. 이젠 언제든지.... 하나님 곁으로 가도 좋게 되었어... 내가 언제든 너희들과 헤어지더라도 나를 아주 잊어버리는 건 싫어. 그래서 너희들에게 반지를 하나씩 주겠어.”

그녀는 4개의 반지를 동생들에게 주고 이윽고 마지막 반지를 나에게 주었다. 반지에는 ‘신의 뜻대로’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반지를 그녀에게 되돌려주며 말한다.

“이 반지를 내게 주시려면 당신이 가지고 있어요. 당신은 것은 내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녀는 반지를 되돌려 받으며 나를 깨우쳐준다.

“넌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어.”

훗날 다시 만날 날까지 마리아는 그 반지를 간직하고 있을까? 반지에 새겨진 ‘신의 뜻’은 어떻게 작용할까?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과연 알게 될까?

평생 단 1편의 소설을 발표한 막스 뮐러
평생 단 1편의 소설을 발표한 막스 뮐러

나는 그녀 곁에 있을 때만 살아있다

“어떤 사람이라도 한평생을 살다보면 자기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른 채 단조롭고 먼지 이는 포플러 가로수길을 정신없이 걷는 시기가 있다.”

“인생이란 인간의 작은 머리로 그려볼 수 있는 것과는 다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새장 속에서 사는 데 익숙해져서 자유로운 대기 속에 있게 되어도 날개를 마음대로 펴지 못한다.”

이 책에는 이처럼 인생의 교훈을 주는 말들이 부지기수로 등장한다. 사랑에 대한 책이라기보다 삶을 성찰하게 하는 잠언서(箴言書)에 가깝다. 나아가 종교에 대한 비판, 정확히는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사고방식과 행동을 비판하는 말들도 많이 등장한다.

“많은 사람이 참된 기독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는 것은 우리들이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계시를 깨닫기 전에 기독교의 교리를 계시로 믿도록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원인은 ---- 이른바 신앙이라고 하면서 절대복종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간혹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독일신학>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과연 하느님은 누구이고, 진리는 무엇이고, 믿음은 무엇인가를 놓고 매우 어려운 토론을 벌인다. 간혹 사랑에 대해서도 의견을 주고받는다.

“어떤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 어떤가를 안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운명이 호의를 가지고 우리와 만나게 해준 사람을 우리는 단단히 잡아두어야 한다.”

그렇게 나는 마리아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그녀 곁에 있을 때만 살아있는 것이다. 나는 한마디도 말을 나누지 않아도 좋다. 그녀가 잠들어 꿈꾸고 있는 창가에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좋다.”

그러나 운명은 사람의 의지를 따라가지 않고 신의 뜻대로 움직인다. 어쩌면 참된 사랑도 그러할 것이다.

 책 표지
책 표지

더 알아두기

1. 이 소설에서 주요 테마 중 하나로 등장하는 <독일신학>(Theologia Deutsch)은 14세기 후반에 쓰여진 책으로 저자는 누구인지 모른다. 1516년 마르틴 루터가 책으로 긴행했다.

2. 이 소설에는 플라텐(August Platen), 앙켈루스 디레디우스, 매슈 아널드(Matthew Arnold),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등 여러 사람의 시가 등장한다. 여 주인공 마리아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할 수 있는 일은 시집을 읽는 것뿐이지 않았나 싶다.

3. 사실상 평생 1권의 소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작가는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등을 들 수 있다.

4. 빌헬름 뮐러의 시집 <겨울 나그네>는 2001년 민음사에서 첫 간행되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