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의 오류가능성에 많이 생각해보게 되는 요즈음이다. 내 생각과 지식은 정답이 아니다. 상대성 이론에도 맹점이 있다. 양자역학도 진리는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가 전부가 아닐 수 있다. 언제나, 누구나, 틀릴 수 있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늘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오류가능성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 바로 오류가능성일 것이다.

사진 연합뉴스 TV 화면 캡쳐
사진 연합뉴스 TV 화면 캡쳐

요즘들어 오류가능성을 더 많이 생각하는 이유는 당대가 바야흐로 혐오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혐오를 습관처럼 한다. 노키즈존으로 대표되는 아동 혐오, 고령사회로의 진입에도 불구하고 노인을 위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노인혐오, 여전히 심한 장애인 혐오, 남녀 간의 혐오, 종교 혐오.... 수없이 많은 대상들이 혐오의 도마 위에 오르고 ‘심판’당한다. 최근에는 우리 일상의 거의 모든 것들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혐오의 대상이 아닌 것을 찾는 게 되려 더 쉬워 보인다.

필자는 이러한 혐오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롤랑 바르트가 정의한 현대판 ‘신화’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보았고, 지금까지 총 4부작의 신화 시리즈 칼럼을 기획했다.

롤랑 바르트는 현대를 ‘기호를 소비하는 사회’로 정의했다.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소비를 할 때 필요가치를 중시하지 않는다. 그 상품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무엇을 상징하는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다, 우리는 이제 기호를 사고파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기호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의 중요성도 덩달아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롤랑 바르트는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기호를 해석하는 데 오류가 발생하지만, 자신의 오류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믿어버리고 그 믿음이 일반화되면서 하나의 ‘신화’가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현대판 신화는 특정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전달한다. 그 이데올로기는 대체로 기득권이나 이익집단의 이익을 위한 이데올로기이다. 요즈음의 이데올로기는 인터넷을 통해 아주 쉽게 멀리멀리 전파된다. 그렇기에 더더욱 정보 생산 주체를 독점할 수 있는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것이 쉬워졌다. 이러한 관점에서 AI, 명품, MZ세대가 이익집단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사람들 인식 속에서 어떤 식으로 기호화되는지를 보았다.

현대판 신화는 왜 위험할까? 그리스 로마신화가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롤랑 바르트는 현대판 신화는 정말 위험한다고 판단한다. 필자도 바르트의 의견에 동의한다. 신화는 사람들이 대상의 일면만 보게 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인간은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복잡하고 재미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유도 다른 생명체들과는 달리 구체적이고 복잡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기 때문 아닐까? 사회는 이렇듯 평생을 봐도 다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이 셀 수 없이 많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조상님들의 말처럼, 일생을 함께하고도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대상이 인간이고, 사회 속에는 그런 인간이 수백 수천씩 있다.

그런데 신화는 이렇듯 복잡한 인간의 일면만 보게 만든다. AI가 가진 여러 사회적 효과들 중에서 긍정적인 면만 보게 만들고, 모두가 구매하기 때문에 좋은 것이라 판단하고 명품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MZ세대는 이렇다며 부정적인 이미지를 못박아놓고 조직에 문제가 터지면 이래서 요즘애들은 문제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 또한 갈등론 신봉자가 만들어낸 신화일 수 있겠다. 우리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신화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신화의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꼭 그런 건 아니지”, “아닐 수도 있는데?”, “네 생각은 어떤데?” 이런 말들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체감하는 요즈음이다.

혐오는 역동적이다. 멈춰있지 않고 더 멀리, 더 넓게 퍼져가고, 몸집을 부풀려간다. 그리고는 이윽고 진화하여 사람을 죽인다. 오랜 시간에 걸친 검증이나 재고 없이, 어떤 대상이 단지 어떤 면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일 듯이 욕하고 미워하고 사회 밖으로 내몰려고 한다. 그런데 그 뒤에 남는 건 과연 뭘까. 혐오한 사람이나 혐오 당한 사람이나 피차 서로에게 남은 것이라곤 구차해진 모습과 소모된 감정뿐이다. 결국 이러한 혐오를 만들고 부추겨서 이득을 보는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다. 신화를 통해 이데올로기가 전파되길 원했던, 돈과 힘을 지닌 이익집단 말이다.

그러나 사회가 존재하는 한 혐오가 사라지길 바라는 걸 힘들 것이다. 어쩌면 혐오는 특정 이익집단의 계획적인 부추김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디 악하게 태어나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어떻든 인류 역사 전 기간을 통틀어 혐오가 없던 시대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꿈꾼다면 혐오의 성질을 바꿀 수 있다. 역동적인 혐오가 아니라 정적(static)인 혐오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혐오가 멀리 가지 못하도록, 몸집을 불리지 못하도록, 사람을 죽일만큼 심각해지지 않도록 그 성질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인식이다. 우리 스스로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다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사회속에서 다양한 많은 것들이 새로이 생겨날 것이다. 그것들을 보면서 “지금 당장 내 눈에 보이는 것 외에 또 어떤 다른 점들이 있을까?”하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신화에 동조하거나 새로운 신화를 만들고 그것만을 잣대삼아 대상을 평가하기 전에, ‘그것이 전부일까?’ 먼저 생각해보는 사회가 되길 원한다. 대상의 일면만 보게 만드는 혐오의 가면 뒤에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가치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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