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님은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버럭 소리쳤다. "야 이새끼야. 아까 내가 하는 거 안 봤어?" 처음 해 보는 일이어서 버벅대던 난 그 소리에 더 허둥댔다. 팀장님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땀을 뻘뻘 흘리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안보교육이 시작됐다. 국회 보좌관 80%가 빨갱이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투표하라는 불호령을 들으며 김치찌개를 끓였다. 서이초 교사의 사망이 전교조의 "자업자득"이라는 이야길 들었을 땐 도저히 표정관리가 안 됐다. 입을 열면 좋은 소리가 안 나올 것 같아 조용히 숟가락만 뜨고 있는데 팀장님이 또 한마디 한다.

"이새끼... 그렇게 입 다물고 있으면 열심히 해도 병신 소리 들어. 알아?"

주말에 다닌 도배학원에서의 한 장면이다. 우리 집 도배 정도는 직접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도전한 일이다. 금 같은 주말과 금반지 두 개는 살 수 있는 학원비를 내고 등록했는데 이게 웬걸. 몸이 힘들 건 알았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예상 밖이었다. 빗발치는 폭언에 군대로 돌아온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앞서 팀장님이라고 표현한 사람은 도배판에서 40년을 일했다는 강사다. 학원생인 우릴 현장 작업자들처럼 대한다. 자기 밑에서 일하는 도배사들은 어린 개 취급을 당하는 게 일상이라고 본인 입으로 말한다. 강사는 평일반 학생들은 아무리 욕을 먹어도 웃는다며 현장에서 일할 마인드가 됐다고 평한다.

본업이 있는 주말반 학생들과 달리 평일반에는 도배를 업으로 삼으려는 분들이 많을 거다. 현장에서 오야지(책임자)로 일하는 강사를 통해 일자리를 얻어야 하는 입장이다. 매달 전국의 도배학원에서 신규인력이 쏟아지는 마당에 신축 아파트 수십 동을 담당하고 있다는 강사는 절대권력자다. 그래서 갑질이 갑질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갑질할 수 있으리라.

서로에 대해 잘 알아야 교육효과가 좋아진다며 자꾸 직업을 묻길래 공공기관에 다닌다고 하니 남의 세금으로 편하게 돈 벌어서 좋겠다고 한다. 동작이 느리던 40대 여자분은 "저따위로 할 거면 술집이나 나가는 게 낫지."라는 강사의 혼잣말을 듣고 바로 학원을 관뒀다.

강사는 일주일에 한 명씩 팀원이 관둔다며 요즘 젊은것들은 힘든 걸 참지 못한다고 성화다. 그 얘길 들으며 생각했다. 그들이 정말 힘들어한 게 뭐였을지 이 사람은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을까.

사진 EBS다큐 관련화면 캡쳐
사진 EBS다큐 관련화면 캡쳐

스무 살에 용돈벌이 삼아 새벽 인력시장에 나간 적이 있다. 친구와 한 달간 아파트 건설현장부터 도로 공사장까지 다양한 현장에 갔다. 집에 돌아오면 온몸이 쑤셨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힘든 건 사람이었다. 무례한 말과 행동에 치이며 '남의 돈 버는 게 쉽지 않구나' 애써 납득하면서도 친구와 이런 얘기를 나누곤 했다. "근데 꼭 저렇게 말해야 되나?"

15년이 지난 지금, 비록 그 모서리에서 맛본 단편적인 경험이지만 이 공간에선 유독 시간이 느리게 흐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시절엔 이것이 낭만이었을 수도 있다. 이새끼 저새끼 소리를 들으며 일을 마친 뒤 "내가 너 제대로 키워보려고 그런 거니까 담아두지 마라."라는 한마디, 그리고 소주 한 잔으로 모든 걸 털어버리던 시절도 있었을 거다.

이미 지나간 시간에 익숙해져 새로운 것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집단마다 저마다의 문화가 있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잣대는 다르다는 것도 안다. 넋 놓고 있으면 다치기 쉬운 현장이고, 빨리 일을 끝내야 체력을 비축하고 내일도 일할 수 있기에 예의를 차릴 여유가 없을 것도 싶다.

하지만 강사가 말하는 요즘 젊은것들은 부당한 게 무엇인지를 안다. 상하관계라고 막말을 해선 안 된다는 것도, 개인의 비극을 함부로 입에 담으며 정치관을 강요하면 안 된다는 것도, 배움이 느리다고 술집이나 나가라고 하는 건 명백한 성희롱이라는 것도 안다. 그들은 견딜수록 성장하는 대신 스스로 깎여나가는 시간이 아까워 현장을 떠나지 않았을까. 하다못해 인격적인 오야지를 찾아서 말이다.

다른 강사분이 땜빵으로 하루 수업을 대신 진행한 적이 있다. 화법은 직설적이었지만 선을 넘지 않았고, 대화의 주제도 도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풀질하는 꿀팁을 젠틀하게 가르쳐주는 그를 보며 역시 진리의 사바사, 팀바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모로 유쾌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배운 게 많은 건 확실하다. 베테랑인 만큼 유튜브에서는 볼 수 없던 기술을 많이 알려줬고, 욕을 덜 먹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실력도 빨리 늘었다. 각자의 이유로 도배를 배우는 동기들을 보며 동기부여도 됐다. 다음 달 이사가는 집의 도배를 직접 하면서 이 분이 생각날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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