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어른이 되고 나면, 모든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어린 시절의 감각이죠. 인생을 헤쳐 나가기 위한 길잡이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나이가 몇 살이든 직업이 무엇이든 그건 다르지 않아요.다만 어린 시절에 체험한 일의 가치와 자신이 원래부터 갖고 있던 것의 중요함은 어른이 되지 않고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으니, 인생이란 참 절묘한 것 같습니다"

-요시모토 바나나 <어른이 된다는 건> 중에서

어렸을 땐 명절이 너무 좋았다. 걱정이라곤 퐁퐁이를 먼저 탈까, 피씨방을 먼저 갈까 밖에 없었던 시절. 나이를 먹을수록 명절은 그 나잇대의 걱정이 극대화되는 상징적인 시간이 되어갔다. 입시, 취업, 결혼, 출산 같이 너무 뻔한데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들 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집안이 작아 또래들 간의 비교로 스트레스 받을 일은 적었다. 독불장군인 할아버지로 인해 명절의 마지막은 말다툼으로 끝났지만,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일 일이라곤 결혼식과 장례식 밖에 안 남은 지금은 어른들이 싸우던 그 장면조차 그립다.

향 피운 연기가 아릿하게 떠다니고, 곱게 깎아놓은 배며 밤 같은 것들이 제기 위에 반듯하게 올라가 있던 모습도.

사진 KBS 관련화면 캡쳐
사진 KBS 관련화면 캡쳐

이제 우리 집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아버지는 독실한 크리스천이 아닌데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마자 제사를 없앴다. 아무래도 부모님이 그리울 때 향을 피우는 대신 속으로 엄마, 아빠 하고 부르기를 선택한 것 같다.

난 명절 때마다 누나와 친척 동생들과 삼촌 방에 틀어박혀 만화책을 읽곤 했다. 삼촌 방은 보물창고였다. 그곳에서 슬램덩크, 용비불패, 소년탐정 김전일 같은 세기의 명작들을 만났는데, 최고는 드래곤볼이었다. 42권짜리 전집을 족히 50번은 돌려본 것 같다.

내가 가장 좋아한 캐릭터는 피콜로였다. 작품 초반까지만 해도 전 지구인을 공포에 떨게 만든 악의 화신 피콜로는 프리더, 셀, 마인부우 같은 초강력 빌런들이 등장하며 팔자에도 없는 "지능캐릭터"로 변신했다. 슬프게도 작품 내에서 머리가 좋다고 한 번인가 묘사됐을 뿐, 제갈공명 같은 지혜를 발휘해 스토리에 영향을 준 일은 거의 없다.

피콜로는 그렇게 듣보잡이 되어 갔지만, 드래곤볼이 완결된 마지막 순간까지 폼잡고 팔짱을 낀 채 저 뒤편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힘은 미약해도 망설임 없이 동료를 위해 몸을 던졌다.

난 그 모습이 좋았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최강의 악당 자리도 이미 내놓은 지 오래인 퇴역 빌런이지만,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현실을 부정하는 대신 묵묵히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삼십대의 추석은 어른이 될 준비는 안 됐는데 나이로 보나 얼굴로 보나 누가 봐도 어른이 돼버려 진짜 어른인 척하느라 진땀 흘리다 잠깐 쉬는 느낌이다.

피콜로 대마왕을 좋아했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나를 보호해주는 어른들 덕에 내가 나를 보호할 필요도 없고, 내가 타인을 보호할 책임도 없었던 그 시절의 감각을 되살려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 본다. 그래야 다시 바깥세상에서 묵묵히 서 있을 힘을 얻을 수 있으니까.

비굴하게 살지 않기 위해선 초싸이어인 3 뺨따귀 때리는 내면의 힘이 있어야 하고, 드래곤볼과 다르게 선과 악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버티려면, 피콜로 더듬이 빠는 소리나 해대던 철없는 어린 시절의 감각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느낌을 잘 간직했다가 언젠가 만나게 될 내 아이에게도 온전히 전해주고 싶다.

모두가 너를 긍정하는 시간을, 아무 걱정 없이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합심해 울타리가 되어 주는 시간을 꼭 너에게 선물해서

힘들어도 세상은 살 만하다고, 최악의 순간에도 행복은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게 도울 거다.

아끼는 회사 후배의 스타벅스 닉네임이 "피콜로짱짱맨"이라는 얘길 듣고 빵 터진 적이 있다. 나만 피콜로를 좋아한 건 아니었구나 싶었다. 그가 어디선가 행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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