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연합뉴스TV 화면캡쳐 
사진 연합뉴스TV 화면캡쳐 

솔리만은 TV를 보다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파도가 치는 장면이었다. 나중에 이유를 듣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솔리만은 배를 타고 가자지구를 탈출했는데, 같이 출발한 다른 배가 항해 도중 침몰했다고 한다. 그 배에는 그의 아내가 타고 있었다.

​벨기에 리에주(Liege)에서 기차로 30분을 달려 Aywaille역에 도착해 다시 버스로 20분을 가면 적십자센터가 보인다. 벨기에 정부는 망명 신청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센터운영을 적십자에 위탁했다. 적십자는 이들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고 다양한 스포츠와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스텝으로 지내던 당시에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인 IS의 침략, 시리아 내전, 그리고 가자지구 분쟁으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로 붐볐다. 전쟁뿐 아니라 기아, 정치적 박해, 인종차별 등을 이유로 고국을 등진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벨기에 정부에 망명자로서 법적 보호를 신청한 상태였다.

마흐무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40대 가장인데 다행히 가족들과 함께 왔다. 열 살인 쌍둥이 두 딸은 쉬지 않고 앞마당을 뛰어다니는 개구쟁이다. 센터 안에 있는 학교에서 프랑스어와 수학을 배우고 있었다. 10대 후반인 큰딸은 대학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벨기에는 대학교육이 거의 무료인 데다 난민 신분이라도 학교에서 받아준다고 한다. 세 딸을 바라보는 마흐무드 부부의 표정에 안도감이 엿보였다.

그들은 매우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가족의 생사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적십자에서는 세계대전 때 구축한 시스템(Chasing system)을 통해 생이별한 이들을 연결해 주고 있었다. 자신의 인적사항과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사진 등을 제출하면, 적십자에서 서로 매칭되는 데이터를 찾는 방식이다. 이 시스템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고 직접 만난 사례도 있다고 한다.

시리아 청년 바쉬르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다. 내전으로 가족을 잃은 기억에 더해 망명신청이 거부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견디기 힘들어서였다. 망명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10분의 1에 불과하다. 게다가 결과가 나오기까지 길면 2년이 걸려 무기력증에 빠지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스포츠 활동에 집중한다. 땀 흘리며 악몽 같은 기억과 무력한 자신을 잊는다.

망명신청이 받아들여지면 벨기에 정부의 지원 아래 집과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 거부된 사람들은 30일의 유예기간이 주어진다. 그 사이에 변호사를 구해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다른 나라, 혹은 고국으로 가야 한다. 돌아갈 곳이 없어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한때 이라크 축구선수였다는 아흐마드는 육개장 맛이 나는 매콤한 고깃국을 기가 막히게 끓였다. 같이 일했던 프랑스 동료 앙젤은 너무 맵다며 연신 물을 들이켰지만 난 두 그릇을 비웠다. 망명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수도인 브뤼셀에 음식점을 차리기 위해 열심히 요리를 연습하고 있다고 했다. 운동으로 다져진 그의 팔근육이 후라이팬을 흔들 때마다 팽창했다.

솔리만은 와이파이존에서 나를 만나면 이어폰 한쪽을 건네곤 했다. 우린 유튜브로 팔레스타인 음악을 들었다. 그가 보여준 옛 가자지구 사진은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늘 걷던 산책길은 탱크가 차지하고, 자주 가던 카페는 포격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져내린 건 어떤 것일지 난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 세상 어딘가엔 내가 당연시하던 세계가 파괴된 상처에 무너지지 않고 또 다른 세상을 만들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 알게 됐을 뿐이다.

부디 그들의 망명이 무사히 받아들여졌길 기도한다. 그리고 언젠가 벨기에에 놀러 갔을 때 어느 벤치에 한가롭게 앉아 와플을 씹어먹고 있는 솔리만의 모습을 볼 수 있길 바란다. 그가 안전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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