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6일 부산 도시철도 서면역에 배치된 경찰특공대와 장갑차, 폭발물탐지견. 부산경찰청은 잇단 '묻지마 흉기난동'과 살인을 예고하는 온라인 게시물 속출 사태와 관련해 부산 시내 다중 이용 시설 등 152곳에 기동대와 특공대, 자치단체 공무원 등 900여 명을 배치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진 연합뉴스
지난 8월 6일 부산 도시철도 서면역에 배치된 경찰특공대와 장갑차, 폭발물탐지견. 부산경찰청은 잇단 '묻지마 흉기난동'과 살인을 예고하는 온라인 게시물 속출 사태와 관련해 부산 시내 다중 이용 시설 등 152곳에 기동대와 특공대, 자치단체 공무원 등 900여 명을 배치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진 연합뉴스

버스 정류장에서 초등학생이 이어폰 없이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다. 시끄러웠지만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공장소에서의 예의를 가르쳐 주었을 때, ‘왜요?’나 ‘아저씨가 뭔데요?’라고 되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초등학생은 합법적으로 마음껏 무례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괜찮았다. 그 무례는 언젠가 칼 맞을 수 있다는 기대로 참아졌다. 바야흐로 체념사회다.

회광반조(回光返照)의 시간이다. 한국사 최초로 대한민국은 ‘k-’로 표상되는 문화제국주의 위상을 누리는 중이다. 가장 좁은 영토에서 가장 큰 힘을 뿜어낼 수 있는 원동력은 무한 경쟁 체제였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묻는다면 방탄소년단이 아니라 방구석경비원들을 보라 이를 것이다. 핑크빛 미래는 블랙핑크의 몫이다. 경쟁에서 도태된 다수는 방구석에서 모든 것에 냉소할 뿐이다ㅋ. 이 글 역시 한때 88만원 세대였다가 정부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중년으로 폐기된 자취생의 ‘-ㅋ’다.

‘나’는 체념되었다. 대한민국 청년들은 자발적 멸종을 선택했다. 2023년 상반기 합계 출산율은 0.7이다. 초저출산은 불평등이 심화된 한중일의 공통 경향이지만, 한국은 전무후무하다. 2022년 기준 일본 1.26, 중국 1.09, 한국 0.78이다. 한국은 반 년 만에 0.08이 감소했으니 0.5에 도달하기까지 몇 년이 걸릴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k-’의 영광은 0.7에 기여한 사람들의 몫일 뿐, 나머지들은 방구석에서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며 ‘k-’인지 ‘-ㅋ’인지 모를 ‘kㅋ’를 먹으며 달달함을 자위한다.

‘적당한’의 기준이 높아졌다. tv 속 연예인들의 호화로운 삶과 sns 속 과시 행위가 평균의 기준 상향화를 부채질했다. 알뜰함이 찌질함이 되고, 사치가 플렉스가 되었다. 기준을 하향한답시고 연예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인서울 4년제 정도는 나와야 적당한 사람 취급하지만, 현실은 상위 11%에 해당한다. 약 90%가 루저가 되는 상호주관적 상상물 속에서 체념은 일상화 될 수밖에 없다. 월 300만 원 벌이에 출산을 이야기하면 무책임하다고 욕했다. 그 와중에도 배달 음식과 아이폰은 포기하지 못했다. 중위소득이 300만 원에 못 미치는 나라의 블랙코미디다.

스타벅스의 카공족을 보면, 체념이 공고해질 것을 확신한다. 그 공간에 있을 대학생, 혹은 취준생은 부모의 부에 기반한 아비투스를 누리는 중이다. 통계적으로 이들은 부모보다 잘 될 가능성이 낮으므로 이들 중 다수는 현재의 아비투스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숨 쉬는 것처럼 평범했던 일상을 철회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부모로부터 독립한 순간부터 조금 더 저렴해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분명 결혼과 출산은 비합리적 선택이다. 조만간 저가형 커피에 길들여질 ‘노오오오오오력’이 필요할 것이다.

내 후배들은 나처럼 혼자 무럭무럭 늙어가고 있다. 나이 들면 확실히 알게 된다. 비혼은 신념이라기보다는 인지부조화다. 할 수 없는 것을 하지 않은 것으로 위장하더라도 결혼/출산 시장에서 탈락한 열등한 상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살아오던 관성의 힘으로 살아가긴 하지만, 살아지며 사라져 가는 시간은 시시하다. 나이 먹은 혼자는 생(生)의 활성 자체가 떨어진다. 어렸을 때 꿈꾸던 치킨 한 마리를 독차지 하는 어른의 권력은 딱 거기까지다. 그 정도의 권력을 누리는 대가는 내 미래를 체념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나’를 체념하게 만들었다면, 민주주의가 ‘너’를 체념하게 만드는 중이다. 자유의 피로 쌓아 올린 인권이 타인이 싸지르는 자유의 피로를 가중시킨다. 인권은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권리를 침해한 무뢰배를 위해 적극적으로 작동했다. 최근 잇따른 교사들의 자살은 인권이 구축한 불완전한 시스템에 의한 타살이다.

20세기로 들어서며 신은 죽었다. 죽은 신의 자리를 인간이 찬탈했다. 인간은 신을 ‘발명’했듯, 인권을 ‘발명’했다. 백성이 왕과 귀족의 가축인 시절, 인권은 유효했다. 물론 지금도 자본가의 사축화 된 사람들을 위해 인권이 필요하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 억압받고 있는 소수자들에게도 필요하다. 그러나 근대적 발명품의 기계적 적용은 정작 보호받아야 할 대상을 외면하고, 억압해야 할 대상을 보호하고 말았다.

인권의 남용은 현대 인류에 대한 문화 지체다. 현대는 신의 자리에 들어선 인간마저 죽이고, 그 자리에 ‘나’를 앉혔다. 신이 ‘나 스스로 나인자’였듯, ‘나’들은 ‘난 나야.’로 설명하려 들었고, ‘네가 뭔데 날 판단해?’라며 타자성을 절대 부정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새로운 신이 탄생한 것이다. 천박한 소비 습관이 보편화 된 것도 사치품은 신에게 바치는 합당한 제물이기 때문이다. 저출산의 그늘이 짙을수록 민주사회의 신들은 보상심리로 ‘나’를,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 갔다. 탐욕의 신들은 너무 많았다.

윤리는 ‘다양성 존중’으로 단순해져 갔다. 다문화 시대를 맞이한 민주사회에서 다양성은 이해하기 단순한 미덕이었다. 그러나 이 다양성은 타자와 거리두기로 수행되었다. 다양성 존중은 ‘내가 너를 간섭하지 않듯 너 또한 나를 간섭하지 말라’는 배타성과 ‘네가 무엇이든 내 알 바 아님’의 무관심이 복합된 결과인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인격과 나로서의 개성의 다름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성과 무책임이, 다양성의 탈을 쓰고 기고만장했다.

인권은 개성이 아니라 인격을 존중해야 했다. 인격은 개성을 발산하는 인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은 다양한 개성으로 분화되지만 모든 개성이 사회적으로 유효한 것은 아니다. 학생이 선생에게 악다구니 쓰는 ‘왜 자는 사람 깨우고 그래요?’나 학부모가 선생에게 따지는 ‘네가 뭔데 우리 애한테 청소를 시켜?’ 또한 개성의 표현 양식이다. 모든 개성을 존중할 때, 사회는 리바이어던 이전의 혼란 상태를 초래한다. 실제로 인권은 사회 일부에서 무례한 개성에게 의기양양의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개성이 아니라 인격을 존중해야 했지만, 사건이 터지고 나면 가해자들은 산 사람이어서 살아야 했고,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아마 새로운 법이 제정될 것이다. 그래 봤자, 인간관계가 개인 간 호혜가 아니라 법으로 작동하는 영역이 더 넓어질 뿐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의 인간미는 우리 살아생전에 다시 응답할 일 없을 것이다. 갈등 해결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 아니라 경찰과 변호사의 일로 이관된다. 법으로 연결된 인간들은 잠시 공생하되 항구적 공존에는 관심 없다. 인간은 네가 뭘 하든 간섭하지 않는 것으로 이 시대의 시민성을 실천한다.

법으로 지탱되는 공동체는 편의점을 닮았다. 우리는 매뉴얼을 따르는 기능으로 관계한다. 인권을 통제하는 사람들은 이 풍경을 외부에서 바라볼 수 있다, 고상하게. 질서정연한 상품은 아름답고, 폐기된 상품은 알 바 아니다. 그저 인권을 수호하는 본인의 개성에 도취되어 희생자는 애도하되 책임지지 않는 도덕성을 묵묵히 실천할 뿐이다. 자신은 멋진 사람으로 남을 수 있어서 좋겠다. 버스정류장에서 무례한 초등학생과 조우할 일이 없어서. 보다 적극적으로 ‘수입’될 외국인 노동자와 섞일 일도 없어서. 이것은 ‘k-인권’이다.

최근에 발생한 칼부림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콜라보 된 체념 사회의 부작용이 아니라 주작용이다. 무차별 칼부림이 사이코 패스의 일탈로 치부되는 사태가 놀랍다. 경쟁과 방종의 그늘이 깊었으므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 울림을 줬던 것은 이미 꺾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디어 속 월드컵 16강을 찍는 동안 은둔형 외톨이는 40만 명에 이르렀다. 체념에 길들여진 마음을 살피지 않는 인권의 오만함이 ‘옹졸한 나’와 ‘무례한 너’를 더 체념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엄마가 돌아가시고 내 통장 잔고가 바닥을 긁을 때, 자살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 다시 만나자, 초딩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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