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한 소설가의 강연을 들으러 간 적이 있다. 

그 작가의 소설 제목은 하나만 알고 있었고, 그마저도 읽지 않은 상태였지만 일단 신청을 하고 강연장소인 도서관으로 향했다. 강연시작 한 시간 전에 도착한 나는 재빠르게 그녀의 책들을 검색했고, 단편소설 한 편을 벼락치기하듯 읽어 내려갔다. 사랑에 빠진 이의 감정이 잘 묘사된 사랑 이야기였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헤어짐 이후 헤매는 소설 속 인물의 모습이 나와 닮아 강연을 빨리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장된 리액션을 가진 방청객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거려 가며 작가의 말을 경청하다가 내 몸과 표정이 얼어붙은 순간이 있었다. 등단한 지 10년이 넘었다는 작가는 쓰는 일을 좋아한다 했는데, 주변 사람들만 봐도 그렇다는 말을 덧붙였다. 어떤 사람이 뭔지 잘 모르고 어떤 일을 시작했더라도, 그 일을 10년 넘게 하다 보면 결국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모르고 입사해 14년째 똑같은 직장에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이 일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 내 얼굴에 쓴웃음이 드리워졌다.

나는 뭐지? 나는 왜 이럴까?

내가 주어진 현실에 제대로 안착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지한 건 마흔이 되기 몇 년 전부터다. 나를 둘러싼 업무 환경은 그저 답답했고, 회사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은 마냥 버거웠다. 누군가로부터 충고나 조언을 들으면 (완전히 무시하시도 못하면서) 딱히 나보다 나은 것도 없어 보이는 너나 잘해라는 심보가 꿈틀거렸다. 특별한 이유와 특정한 대상 없이 출근만 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천불이 솟구치기도 했다. 직장인으로서 받는 스트레스는 술, 쇼핑, 여행 등으로 대충 진정시킬 수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이런 류의 처방도 약발이 안 먹혔다. 

사진 논객닷컴DB
사진 논객닷컴DB

자의든 타의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든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던 나의 오랜 습관도 멈췄다. 내 발을 디뎌가며 내가 직접 겪은 일들인데 '나의 경험'으로 소화시키고 싶지 않았고 '나의 것'으로 인정하기 싫었다. 조직은 저급하고, 주변 사람들은 역겨웠으며, 일은 시시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한 달이, 일 년이 무의미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이거 진짜 아닌 거 같은데, 나 정말 이렇게 살다 죽는 건가? 하는 질문을 처음으로 맞닥뜨린 자의 자연스러운 증상들이었던 것 같다.

스스로에게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질문과 대답을 모두 혼자 해야 하니 그 어떤 때보다 레퍼런스가 절실했다. 나보다 먼저 터닝 포인트를 겪은 사람들의 얘기를 구하러 다니고 그것에 눈길을 주며 귀를 갖다 댔다. 인생의 대전환이란 것이 나에게도 있을까 하는 기대감과 제발 내게도 벌어지기를 하는 바람이 공존했다. 아무리 각자의 속도가 다 다른 거라 해도, 자기에 딱 맞는 옷을 진작에 찾아 입고 저만치 앞서 있는 듯한 사람들의 얘기는 일부러 지나쳤다. 어느새 그들과 나를 비교해 매번 열패감을 느꼈고, 그로 인해 불안감이 더 짙어졌기 때문이다. 

정규 교육과정을 밟고 퇴직까지 다니려면 다닐 수도 있는 회사의 정규직, 등 따습고 배 불러야 정상인데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듯하고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듯한 통증을 못 참고 스스로 방향을 튼 사람들의 얘기가 나의 주된 참고서였다. 정확한 통계를 내본 것은 아니지만 대개 그들의 변곡점은 마흔 전후 그 언저리에 있었다. 변화의 계기가 외부적인 것에 있든 내부적인 것에 있든 그 시기가 묘하게 비슷했다. 일정 코스를 벗어나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 코스의 이탈을 계획하고 자기만의 궤도를 따라가기 위한 준비를 마흔을 기점으로 하고 있었다. 주어진 트랙에 대해 그 어떤 불편함과 의문 없이 따를 수 있는 마지노선이 마흔까지인가 싶을 정도였다.

회사를 다니면서 준비하든, 회사를 나와서 준비하든 내가 찾은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고민은 천천히 깊게 하되, 생각이 정리되면 곧바로 실행으로 옮긴다. 절대시간의 부족,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걱정과 두려움을 핑계삼지 않는다. 그들의 고군분투는 결과까지 있어 설득력이 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직업과 경력의 범주로 억지로 끼워 넣고 버티기엔 그 너머의 소명을 향한 내면의 목소리가 커지는 시기, 

타인과 세상의 기준이 아닌 내 기준을 우선순위로 삼고 그에 따른 선택을 하고 싶은 시기, 

가진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의 분별이 있어 포기해야 할 건 과감히 놓아주고 진짜 가지고 가야 할 것만 파고들어야 할 시기.

아주 오래전부터 나의 소명이라 믿었던 것을 마흔이 돼서야 하나둘 펼치고 있는 인생 2회 차, 나는 지금도 결과가 없고 어쩌면 앞으로도 결과가 없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마흔의 상태를 끄적이는 건 스스로에게 치는 배수진이자 지금 이 순간의 내 기분과 이때의 공기를 잊지 않기 위함이다.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었던 12세기 예루살렘, 평범한 대장장이였던 발리앙이 예루살렘 성안의 백성을 지켜내는 기사로 성장하는 여정을 다룬 영화 <킹덤 오브 헤븐 디렉터스 컷>에 오늘의 내가 기억해야 할 대사가 나온다.

전쟁에서 대승한 16살 땐 백 살까지 살 것 같았는데 이젠 서른도 자신 없어. 그 누구도 자신의 끝을 알 수는 없네. 누가 우리를 이끌 것인지도.

말은 킹에게 복종하고 아들은 아비를 따르지.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 때 진정한 게임을 하게 되는 거지. 누구와 어떤 게임을 하든 영혼만큼은 자네 것임을 명심하게. 비록 게임의 대상이 왕이든 권력자이든 말일세.

하나님 앞에선 변명이 소용없어. 누가 시켜서 했다 혹은 당시엔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건 안 통하니 명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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