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ABC협회장

한국ABC(Audit Bureau of Certification)협회는 신문과 잡지의 발행부수를 산정하는 민간 언론기관이다. 

신문 뉴스의 소비형태가 발행배포에서 인터넷 검색 중심으로 바뀌면서 이 협회에 대한 주목도는 낮아졌다. 필자는 2021년 9월 이 협회의 정기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임돼 2022년 8월 사퇴했다. 그 기간은 정치의 잘못된 개입으로 제도가 어떻게 망가지는 가를 확인한 기회였다.

이 협회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다고 역할의 중요도가 낮아진 것은 아니다. 수많은 신문 잡지들 가운데 각각의 발행부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아는 것은 광고주는 물론 독자들의 매체 선택에 참고 지표로 가치를 지닌다. 인터넷이나 SNS에서 소비되는 주요 뉴스는 거의가 인쇄 뉴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언론체제를 갖추고 있는 국가들엔 모두 ABC제도가 있다. 이 제도의 국제기구인 IFABC 회원국은 북미와 서유럽 국가가 중심이고, 아시아의 회원국은 한국 일본, 인도 3개국뿐이다. 한국은 1989년 회원 가입 후 34년째 이 제도를 유지해오고 있다.

그런 협회가 지금 2년 넘게 기능정지 상태다. 협회의 내분에도 일부 원인이 있지만 정치가 제도를 망가뜨린 표본이다. 먼저 내분에 대해 설명하자면 발단은 2020년의 일로, 협회의 사무국장이 회장의 재가도 없이 협회 돈 3억 원을 옵티머스 펀드에 투자한 사실이 펀드 부도 이후 적발돼 해고된 사건이었다.

그러자 사무국장은 그해 11월 회장이 직원들과 짜고 모 일보의 발행부수를 절반 이상 부풀렸다는 허무맹랑한 내용의 진정을 문체부에 냈다. 아무런 근거의 제시없이 제기된 이 진정은 진정자의 해고가 직접적인 동기였다는 점에서 신빙성에 의심의 소지가 다분했다.

그럼에도 문체부는 즉각 협회에 대한 사무검사와 해당신문사의 2~3개 지국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고, 그로부터 4개월 뒤 진정 내용이 사실인 것처럼 공식 발표했다. 협회가 인증한 2019년도 발행부수는 120만부였는데 그중 절반이라면 60만부에 해당된다. 매일 60만부를 무가지로 발행한다는 것은 종이값 인쇄비 배달비를 합해 연간 700억 원이 소요된다는 것이 협회의 계산이었다.

협회가 그런 엄청난 양의 부수를 조작한다는 것은 중범죄로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신문사가 그런 비용을 감당하며 경영을 한다는 것도 상식을 벗어난 일이다. 1980~1990년대 매체사 간에 과당경쟁을 벌였던 때도 그런 무모한 경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문의 발행부수 감소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한국 신문들의 발행부수도 지속적으로 감소 중인 것은 모두가 알고, 광고주들은 더 잘 안다. 무가지로 부수를 부풀려봐야 광고료가 올라가지 않는다면 신문사들은 종이 값이라도 절약해야 적자를 덜 수 있다.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관청이 문체부다.

사진 KBS 관련뉴스 화면캡쳐
사진 KBS 관련뉴스 화면캡쳐

그점에서 발행부수 절반이 무가지라는 문체부의 발표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사실 왜곡이다. 이 무렵 국회에선 민주당 의원들이 중심이 돼 언론에 대한 징벌적배상제도를 도입하는 논의가 한창이었다. 언론자유에 대한 탄압이라는 여론이 국내외에서 비등하자, 협회 사태를 징벌적배상제도의 도입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사건으로 이용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민주당 의원 24명이 연명으로 이 사건을 경찰에 고발했고, 이들은 경찰과 문체부에 지속적으로 수사를 압박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경찰 조사에서도 조작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현 정부 경찰도 1년 가까이 조사했으나 증거를 못 찾고 지난 8월에야 무혐의 처분했다.

협회는 윤석열 정부가 문재인 정부에서 왜곡된 정책을 바로잡기를 기대했으나, 문체부는 이전 정부가 빌미로 삼은 개선조치를 구실로 협회기능의 정상화를 외면했다. 협회의 업무는 28개월째 반 정지상태이고, 직원들은 5개월째 임금조차 못 받아 생계대책도 없이 방치돼 있다.

경찰 수사결과 조작의 혐의가 없다면 협회의 부수공사에 큰 하자가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문체부는 오히려 협회에 대한 엉터리 조사결과에 책임을 져야할 입장이다. 세상에 완벽한 제도가 어디 있나? 제도는 개선하고 보완해 나가는 것이다. 그것도 민간부분은 민간 자율로 하는 것이 최선이다.

경영난에 시달리는 매체사의 입장에선 비용 부담이 수반되는 협회의 부수공사를 받지 않고도 정부광고를 딸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다만 협회의 수입원을 끊어 존립기반을 없애는 결과가 된다. 그러나 정부나 매체 모두가 생각할 것이 있다. 협회의 기능을 살리지 않는 한 한국은 독립적인 신문부수 산정도 못하는 나라가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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