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이 먹는 게 좋다. 내가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돼 갈 것으로 기대하기에, 세월이 흐르는 게 즐겁다. 언젠가 내가 육체를 벗을 때, 나는 제법 괜찮은 사람이 돼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산다.

삶에 더 많이 감사하고 더 쉽게 행복을 느끼는 게 내게는 큰 축복이다. 나를 버리는 만큼 더 가치 있는 것들로 채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인생이 감사하다.

고등학교 동창들과 2박3일 가을 여행을 다녀왔다. 애초에 맛있는 남도 음식을 염두에 둔 여행이었다. 여행은 28인승 리무진 버스 3대에 동창들을 나눠 싣고 압구정역 공영주차장을 출발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사진 최회봉
사진 최회봉

여행자 단체 카톡방이 아침부터 부산하다. 누군가가 던진 한 마디가 76명의 마음을 금세 하나로 묶는다. 세월 따라 본의 아니게 취약해진 생리 조절 능력과 그 해결책이 나이 든 여행자들의 현안이 됐다.

기발한 해결책이 속출한다. 어떤 친구는 “비닐봉지에 기저귀를 집어넣고 비닐봉지 끝을 고추에 싸매면, 오줌 눠도 기저귀만 젖고 오줌이 밖으로 안 샌다.”고 묘책을 제시한다.

사람들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이것만으로도 이 여행은 충분한 가치를 증명한다. 공감과 잡담이야말로 지금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고, 이들의 삶을 지지하는 힘이 돼 주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내게 진짜 필요한 것은 똑똑하고 잘난 친구가 아니라 공감하고 잡담하는 친구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공감은 함께 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동질감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위로를 얻는다.

70을 눈앞에 둔 나이에 누구나 쉽게 공감하는 첫 번째 화두는 건강이다. 머리카락 숫자가 줄어들고 전립선에 이상이 온다. 관절이 고장 나 움직임에 불편을 느낀다. 고혈압 당뇨 심장병 같은 성인병 하나쯤은 누구나 달고 산다. 동병상련이다. 서로의 간격이 여지 없이 좁혀진다.

그러기에 나이 들어 갖는 동창 모임은 늘 즐겁다. 잡담과 공감이 있어서다. 우선 만남에 부담이 없다. 잡담하고 공감하면서 인생의 가을에 자칫 느끼기 쉬운 외로움과 소외감을 털어내고, 새로운 연대감을 형성한다.

그것이 주는 선물은 치유다.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기에 주어지는 상실감에 치유가 일어난다. 그 대화가 잡담을 넘어서면 오히려 죄악이 되기도 한다. 하나 됨이 깨지고 갈등이 고개를 든다. 그래서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정치, 이념, 종교, 돈 얘기 등을 피한다.

잡담과 공감으로 여행을 연다. 오늘을 사는 게 중요하다.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오늘 하루의 행복이 더욱 소중하다. 그 행복을 더하려고 떠나는 가을 여행이다.

사진 최회봉
사진 최회봉

이번 여행이 우선 추구하는 것은 맛있는 음식이다. 법성포의 영광굴비 정식, 증도의 갯마을 식당에서 먹은 병어조림과 백합탕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선운사 입구에서 만난 고창 풍천 장어와 복분자주가 친구들의 흥취를 한껏 돋운다.

그렇다 해도 이번 맛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강진에서 먹은 남도한정식일 것이다. 전라도 음식 맛의 절정을 보여준다. 엘도라도 리조트에서 조식으로 준비한 짱뚱어탕의 뜻하지 않은 매력도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이것들이 합쳐지니,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맛 여행을 이룬다.

하지만 나를 더욱 감동케 한 게 있다. 증도의 소금밭을 길게 비추던 붉은 낙조는 여행길에 만난 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황홀하고 아름답다. 슬로시티를 표방하는 증도의 엘도라도 리조트도 가족과 함께 꼭 다시 와보고 싶은 곳으로 적어 둔다.

안개 낀 새벽녘 리조트 프라이빗 비치가 안겨준 감동은 전날 만난 낙조의 아름다움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목포 유달산 위를 비행하는 해양 케이블카에서 보낸 시간은 우리 모두를 소년 시절로 데려다 놓는다. 눈과 배가 마음껏 호사를 누린 여행이다.

나이 때문인가. 2박 3일 여행의 여운이 길다. 이미 정평이 나 있는 남도 음식과 바닷가의 환상적인 가을 풍경 때문만은 아니다. 함께 여행한 친구들이 안겨준 감동이 비할 데 없이 컸던 데서 오는 여운이다.

인생 후반전에 이런 좋은 공동체를 갖는다는 것은 행운이다. 여기에서는 세상에 만연한 다툼과 미움, 슬픔을 찾아볼 수 없다. 오직 평화와 즐거움과 감사가 가득하다. 그것이 내 삶에 힐링을 선물한다.

그것이 예상을 깬 것이기에 감동이 더욱 크다. 많은 사람이 함께하고, 술이 곁들여졌기에 자잘한 해프닝 하나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기우였다. 시종일관 유쾌하고 멋진 분위기가 이어졌다.

사진 최회봉
사진 최회봉

우연이 아니다. 상을 차려준 동기회 회장단과 행사 집행부의 희생적 섬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에 서로를 배려하고 감사하는 참가자들의 성숙한 마음이 한데 어우러져, 더없이 멋진 작품을 연출하고 있었다.

내심 감탄한다. 동창은 같은 창문을 보고 지낸 사람들이다. 하지만 각 사람의 개성은 더 없이 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처럼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 것은, 이들이 얼마나 성숙해졌는지를 나타낸다.

사람은 많은 경우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내가 이처럼 성숙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게 자랑스럽다. 즐겁고 행복하다.

여행을 함께 한 친구들 가운데는 50년 만에 보는 친구도 있다. 멀리 캐나다와 미국에서 날아온 친구도 몇 명 된다. 그들에게서 남대천 연어를 연상한다. 남대천에서 알을 깨고 나온 어린 연어는 북태평양을 누비다가, 때가 되면 다시 모천인 남대천으로 하나둘 모여든다.

사진 최회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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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이 다섯 번 변한 쉽지 않은 세월을 잘 살아낸 나의 친구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들의 인생이 잘 익어가고 있는 것을 본다. 시인은 이들처럼 무르익은 대추 한 알을 보면서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고 노래한다.

대추 한 알

-장 석 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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