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잊혀진 전쟁’?

열대지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에 열기를 빼앗긴 듯 초겨울에 접어든 우크라이나 전쟁의 열기는 급속히 식어가는 느낌이다.

지난 두 해 동안 세계의 매스컴을 뜨겁게 달궜던 우크라이나 전쟁 기사는 이제 식은 밥처럼 드문드문 한구석에 놓인 모습이다.

그런 경우 곧잘 등장하는 말이 있다. ‘잊혀진 전쟁’-.!

역사에서는 수많은 잊혀 진 전쟁들이 있으나 지난 반세기 남짓 동안 그 말의 대표적인 주인공은 한국전쟁이었다.

그것은 한국전쟁이 치열하지 않아 시시한 전쟁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 기간이 3년 남짓이어서 약 20년의 아프간 전(2001~2021), 8년의 이라크 전(2003~2011) 및 11년의 베트남 전(1964년 8월~1975년)에 비해 너무 빨리 끝나서일 수 있다.

여기에다 전쟁을 매듭짓지도 않고 ’휴전‘으로 얼버무린 채 70년이 지나도 양쪽 다 마무리 지을 기색도 없이 말 그대로 ’쉬고만‘ 있어서 더욱 잊혀진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다 이 팔 전쟁이 일어나자 세계의 이목을 빼앗긴 우크라이나 전쟁을 두고 ’잊혀진 전쟁‘이라는 말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10월 7일 하마스의 기습으로 전쟁이 시작된 지 열흘 남짓 만에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보낼 포탄을 이스라엘에 보낸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그 말에 무게를 보탰다. 자칫 미국의 우방들인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이 무기 쟁탈전을 벌일 수도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그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10월 31일자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고위 사절단이 워싱턴DC를 찾아 미국 정계를 상대로 추가 군사원조를 촉구했다. 중동 전쟁에만 정신이 팔려 우크라이나 전쟁의 지원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당부인 셈이다.

그 기사의 내용 못지않게 눈길을 끈 것은 그 기사와 함께 실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사진이었다.

그 사진에서 젤렌스키의 찌푸린 표정은 우려나 수심의 정도를 벗어나 낙담한 듯도 했다. 그 모습에서는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자신만만한 분위기를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의 차림새는 전쟁 발발 직후부터 그가 입어 눈에 익은 짙은 올리브색 티셔츠였음에도 풍기는 분위기는 딴판이었다.

그 옷은 ’전투복‘으로 불리지만 무장하지 않은 것이어서 얼핏 보기에는 그저 노동복 같다.

대통령의 차림이라기 보다는 지하철 건설공사장 같은 데서 나온 노동자를 떠올리기 십상이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사진  연합뉴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사진  연합뉴스

하지만 그 차림이 검소하다 못해 누추해 보일수록 그 자태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뿜는 느낌이었다.

그 모습에서 조국이 나치 독일에게 유린당하자 망명정부인 ’자유 프랑스‘를 이끌었던 샤를 드 골이나 역시 2차 대전 중 조국을 점령한 나치 군대를 상대로 그 유명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을 지휘하던 요십 브로즈 티토를 떠올리는 이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던 젤렌스키가 똑 같은 차림을 하고 있음에도 그 사진에서는 드골이나 티토가 아니라 민생고에 시달리는 가난한 소시민 같은 인상만을 주고 있는 것이다.

젤렌스키에게 더 곤혹스러운 것은 ’잊혀진 전쟁‘이란 말의 씨앗이 이 팔 전쟁 이전부터 뿌려져 왔다는 점이다.

실은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 국제사회나 우크라이나 지원국들의 ’피로감‘이라는 말이 등장했었다.

그 피로감이란 “왜 우크라이나 전쟁에 우리 국민들의 피땀 같은 돈을 써야 한단 말인가?” 하는 거부반응에서부터 “그처럼 도와줘서 동유럽의 평화가 이룩될 수 있을까?”하는 회의 같은 것을 뭉뚱그린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다 같은 유럽 국가라 할지라도 그 전쟁에 걸린 국가적 이해관계는 제각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의 태생적인 숙명이라 할 수도 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수많은 유럽 국가들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나선 장면은 얼핏 힘차고 화려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행사장의 만국기처럼 화려한 그 모습이 보기에 따라서는 마치 지난날 판자촌처럼 잡다한 자재로 얼기설기 지은 집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었다. 바람이 세게 불거나 하면 그 잡다한 벽면 가운데 허약한 부분이 날라 가는 것이다.

아니, 바람이 세게 불 것까지도 없었다. 우크라이나의 이웃나라이자 나토와 유럽연합 회원국이기도 한 헝가리는 처음부터 우크라이나 지원과 대 러시아 공세에 어깃장을 놓았으니 그 판자집은 처음부터 구멍 같은 것이 뚫린 셈이었다.

그럼에도 전쟁 초기 우크라이나가 선전을 하자 서방국가들이 열광함으로써 그런 흠은 크게 눈에 띄지 않은 채 젤렌스키는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같은 위용을 자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유럽 국가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러시아가 거쳐 온 역사에 대한 기억이 있다. 나폴레옹 군을 초토작전으로 물리치고 2차 대전에서는 2천만 국민의 죽음을 딛고 나치독일을 물리친 저력 등.

그러다 전선이 교착되자 그 기억이 비집고 나옴으로써 ’피로감‘이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9월말 슬로바키아 총선에서 우크라이나 지원 거부를 공약으로 내세운 로베르토 피초가 총리가 된 것도 그런 흐름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지원에 이상기류가 생긴 것은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판자집으로 치자면 유럽 국가들의 지원에 이상이 생기는 것이 그 바람막이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라면 미국의 그것은 판자집이 기대고 있는 담벽이 흔들리는 셈이다.

드디어 미국의 양대 정당의 하나인 공화당이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에 경고음을 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공화당의 2024대선의 유력한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을 극력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원래 블라디미르 푸틴과 친한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러시아를 편들었으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 푸틴이 돈바스 지역의 독립을 승인하자 그를 천재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그런 트럼프가 이제 지지율의 상승으로 유력한 대선 후보에다 당선 가능성까지 높아지고 있다.

그런 영향인지 10월 초 우크라이나 지원에 호의적이던 공화당 출신 하원의장 케빈 매카시가 해임되고 트럼프와 가까운 마이크 존슨이 의사봉을 쥐게 됐다.

그래서 공화당은 바이든 정부가 제출한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지원을 포함한 1050억 달러(140조원)의 안보 예산안에 난색을 표하며 이스라엘 지원을 위한 143억달러(약 19조원)의 별도 예산법안을 제출했다.

그것은 미국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잊혀진 전쟁‘이 되는 서곡일 수도 있다.

물론 전쟁에는 변수가 많다. 따라서 중동전쟁이 기적처럼 빨리 끝나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집중할 길이 열릴 수도 있다.

그래서 가까스로 연명한 우크라이나가 교착상태를 깨고 승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만은 없다.

그렇게 되면 젤렌스키의 그 티셔츠는 혁명가 체 게바라의 베레모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상·하의가 붙은 사이렌 슈트, 그리고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의 인민복 등과 같은 역사적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됐다 하더라도 ’잊혀진 전쟁‘이라는 말이 등장한 사실 자체가 잊혀질 수는 없다.

그 말로 우크라이나 전쟁의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이 비쳐서다. 그 하나는 세계가 멸망하느냐 존속하느냐가 걸린 듯 한 성전 같은 전쟁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양대 정당의 하나에게 간단히  ’잊혀진 전쟁‘으로 될 수 있는 전쟁의 모습이다.

그러다 보면 의문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서방 매스컴에 무임승차 하다시피 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그것은 러시아의 침략근성 때문이라는 것이 정답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전혀 딴판의 진단도 많다.

러시아에 대한 유럽인들의 오래된 혐오감인 루소포비아(Russophobia)의 발로라는 설도 있고 러시아가 유럽과 경제적으로 너무 친밀하게 된 것을 미국이 견제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 설의 연장선상에서 미국의 셰일 가스를 유럽에 팔기 위한 것으로 지난해 러시아가 유럽에 가스를 공급하는 해저 파이프인 노르트스티림을 미국이 파괴했다는 주장도 꽤 유력하다.

그 어느 주장도 확인되지 못한 채 역사적 과거로 잊혀지기를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역사상 또 다른 ’잊혀진 전쟁‘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이 베트남 전쟁이라고 하면 누구나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우리가 흔히 ’베트남 전쟁‘으로 부르는 전쟁은 1955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지만 그 기간이나 명칭도 가지가지다.

그 전쟁은 북베트남이 이겨 통일을 했으니 잊혀진 전쟁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 20년 전쟁은 도입부와 마무리까지 포함된 서사시고 세계가 흔히 기억하는 ’베트남 전쟁‘은 1964년 통킹만 사건으로 미국이 참전하고 그에 뒤따라 한국 등도 참가했다가 1973년 미군이 철수하기까지의 요란한 8년 전쟁이라 할 수 있다.

그 8년을 떼어내 ’미국과 베트남 전쟁‘이라고 치면 그것은 미국의 ’잊혀진 전쟁‘인 셈이다.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겠다고 ’통킹만 사건‘이라는 자작극을 꾸며 참전했으나 당해내지 못하자 북베트남이라는 호랑이 꼬리를 남베트남에 맡기고 도망친 것이었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 그런 구차한 모양새를 보일 수는 없어 1973년 1월 북베트남과 파리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모양새를 갖추었다.

그런 우스운 평화협정을 체결했다고 협상 대표인 미국의 헨리 키신저 대통령 특별 보좌관과 북베트남의 레 둑 토 정치국원에게 노벨평화상이 수여됨으로써 평화상이 웃음거리가 됐다. 다행히 레 둑 토는 수상을 거부해 노벨평화상의 체면을 반쯤 살린 셈이었다.

그 베트남 판 ’미국의 잊혀진 전쟁‘은 어딘지 우크라이나 전쟁과 비슷한 데가 있다. 두 전쟁이 발발할 당시의 그 열화 같은 위기의식이 비슷해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유럽사회가 러시아의 침략으로 거덜 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됐다면 통킹만 사건이라는 요란한 사고가 터지고 이에 대응하듯 미국이 참전할 때는 아시아가 피바다가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냉전시대의 한 복판에 터진 베트남 전쟁은 동서방의 씨름 같은 데가 있어 훨씬 더 비장한 데가 있었다. 더욱이 당시는 ’도미노 이론‘이 성행해 베트남이 적화되면 동남아가 전염병 걸리듯 모두 적화된다는 우려까지 깔려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 베트남이 공산국가로 통일됐으나 공산주의 세력이 밖으로 나오는 기색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거꾸로 베트남이 공산화된 지 불과 4년 뒤에는 공산국인 중국과 전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면 키신저는 우스운 노벨 평화상에 매달리기보다는 20세기 판 이이제이(以夷制夷)이자 이공제공(以共制共)이라는 손자전법을 구사한 것을 내세워 미국 판 손무(孫武)를 자처하지 않은 게 아쉽다.

그러고 보면 세계사는 수많은 잊혀진 전쟁들을 교각으로 삼아 길게 이어진 교량을 떠올리게도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떤 모습의 교각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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