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사회생활을 시작할 학생 여러분들께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조언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쉽게 사과하지 말라는 것을 당부합니다”

10년쯤 전 철학과 전공 수업 시간이었다. ‘이게 나올 말이 아닌데?’ 싶은 한 마디에 졸음이 달아났다. 내 기억에 따르면, 당시 강사가 펼친 대강의 논리는 이러했다. 먼저 사과한 당신은 아마 선한 사람일 것이다. 때문에 당신은 당신이 객관적으로 잘못한 바가 없어도 마음의 상처를 호소하는 누군가에게 선의를 담아 먼저 사과를 건넸을 것이다. 여기서, 당신이 객관적으로 그릇된 언행을 한 상황에서의 사과는 당연한 도리이므로 논의에서 제외한다. 그러므로 이 논의에서 당신의 사과는 ‘내 언행엔 당신을 상처 입히려는 고의가 없었고, 객관적으로 잘못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건 유감이다’라는 뜻일 것이다.

 

강사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대학 밖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누군가에게 사과를 하는 순간부터 당신은 제3자에겐 ‘사과해야 마땅한 어떤 행동’을 했음을 자백한 것과 같다. 사과를 입에 달고 살면서 존중받긴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니 함부로 사과하지 말라. 하더라도 대단히 신중하게 언어를 다듬어라.

당시 ‘미안하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하고 다니던 나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었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그랬다. 누군가 내 언행에 기분이 상한 듯 한 기색만 보여도 국지도발 징후에 선제타격 하듯 사과했다. 물론 강사의 지적대로 대부분은 ‘내가 죽을 죄를 지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보단 아마 ‘혹시 기분이 상했더라도 고의가 아니었으니 나와 불화하지 말아달라’는 화해의 제스처에 가까웠다. 사과의 대부분은 내가 의도한 효과를 가져다주는 듯 보였다. 다만 내 선제적 사과를 받아든 상대방들 중 일부가 종종 짓곤 하던, 묘한 승리감의 표정만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사과를 하는 건 자기 잘못이라고 밝히는 거라고. 그리고 자기 잘못이라고 밝힌다는 건 상대방이 너한테 계속 욕을 퍼붓고 네가 죽을 때까지 만천하에 너를 고발하라고 부추기는 거야. 이게 바로 먼저 사과하는 것의 치명적인 결과야”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中

밀란 쿤데라@사진 연합뉴스
밀란 쿤데라@사진 연합뉴스

강사의 조언이 세상물정 모르는 상아탑 학자의 기우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 건 예의 그 ‘사회생활’이란 걸 시작했을 무렵부터 였다. 조바심 내며 건넨 사과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내 이미지는 ‘뭔가 잘못한 사람’으로 굳어져 갔다.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낀 건, 어느 순간부터 나도 나 자신의 사과를 당연시 하고 있다는 걸 인지했을 때부터 였다. 갈등 상황이 첨예하고 애매할수록 나는 자주, 그리고 빈번히 나 자신을 용의자로 몰아세웠다. 네가 사과해야지. 넌 대체로 그랬으니까.

몇몇 친구들은 진지한 얼굴로 먼저 사과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어느 날 갑자기 사과를 멈추기 어렵다면, 본인들을 연습 상대로 삼으라 당부한 한 친구도 있었다. 우리 사이에 진짜 사과 받고 싶은 일이 생긴다면 우리 관계를 재고하기 전에 꼭 먼저 말해주겠다고. 약속한다고.

그래서 사과를 참는 연습을 시작했다. 지금껏 꾸역꾸역 쌓아온 빈약한 인간관계마저 무너지는 악몽을 꿨지만 계속 참았다. 결과는 내 예상과는 반대였다. ‘넌 왜 응당 해야 할 사과를 하지 않느냐’고 따져오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가끔 진심으로 건네는 사과들에 무게감이 실렸다. 나 자신을 사과해 마땅한 용의자로 몰아세우지 않으니, 타인의 악의 없는 실수를 그러려니 넘기는 여유도 생겼다. 뜻밖의 성과였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까지 사과를 참는다. 연습을 시작한지도 꽤 오래되었으나 먼저 사과를 건네고픈 조바심은 일정 수준 이상 줄어들지 않았다. 지금은 별 수 없는 천성으로 일정 부분 체념했다. 솔직히, 먼저 사과하고픈 마음을 일정 수준 이상 줄일 수 없는 내가 꽤 괜찮은 인간처럼 느껴질 때도 있음을 고백한다. 나는 내일과 모레도 사과를 참을 것이고, 또 종종 실패할 것이다. 그런 세상도 나름대로 꽤 괜찮으리라는 생각이다.

“맞아. 사과하지 말아야 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모두 빠짐없이, 쓸데없이, 지나치게, 괜히, 서로 사과하는 세상, 사과로 서로를 뒤덮어 버리는 세상이 더 좋은 것 같아”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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