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인희 엽서한장]

30년도 더 지난 가난했던 유학생 시절, 도서관에서 신문 잡지를 정리하는 알바를 했습니다. 영화 관련 잡지를 뒤적이던 중 흥미로운 기사를 한 편 발견했답니다. ‘미국인이 사랑하는 10대 사랑 영화!’

1등 러브스토리(1970년 작품, 알리 맥그로, 라이언 오닐 주연)와, 2등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년 작품, 비비언 리, 클라크 게이블 주연)는 정확히 기억나는데, 나머지 영화의 등수는 다소 뒤죽박죽입니다. 하지만 영화 목록만큼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한 편씩 찾아서 모두 감상했으니까요.

나머지 사랑 영화로는 애수(1940년 작품, 비비언 리, 로버트 테일러 주연), 로미오와 줄리엣(1968년 작품, 올리비아 핫세, 레너드 화이팅 주연), 졸업(1967년 작품, 더스틴 호프만 주연), 로마의 휴일(1953년 작품, 오드리 헵번, 그레고리 펙 주연), 사운드 오브 뮤직(1969년 작품, 줄리 앤드류스 주연) 등이 올라 있었습니다. 외계인이 등장했던 영화 ET(1982년 작품)가 사랑 영화로 기억되고 있음이 신기했구요, 한국에는 ‘애정의 조건’(1983년 작품)으로 소개되었던 영화로 엄마와 딸의 사랑을 그린 ‘Terms of Endearment’가 목록에 포함되었음도 흥미로웠답니다. 나머지 한 편은 사관과 신사(1982년 작품, 리처드 기어, 데보라 윙거 주연)였네요.

한때 미국이 내세울 만한 건 할리우드 무비와 맥도날드뿐이라던 농담이 있었는데, 영화 목록을 다시 보니 할리우드 무비가 낭만적 사랑의 로망, 운명적 열정적 사랑을 향한 갈망을 그리는 데 얼마나 진심이었는지가 느껴집니다.

사진 논객닷컴DB
사진 논객닷컴DB

창밖으로 곱게 물들어가는 단풍을 보며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를 흥얼거리자니, 사랑의 고백이 묵직하게 담겨 있던 영화 두 편이 떠오르네요. 한 편은 나이 들어갈수록 멋스러움을 더해가는 숀 코네리와 묘한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미셸 파이퍼가 주연한 영화, ‘러시아 하우스’(1990년 작품)입니다. 스파이 영화답게 복잡하게 얽혀 있던 줄거리는 거의 잊어버렸지만, 마지막 장면에 등장했던 대사만큼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 영국을 등진 채 유럽을 떠돌며 글로벌 시민을 자처하던 숀 코네리가, 예기치 않게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도 소련 반체제 지식인의 오랜 연인이었던 미셸 파이퍼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드디어 해후하게 된 두 사람. 숀 코네리가 미셸 파이퍼를 품에 안으며 귓가에 속삭이던 대사는 “유 아 마이 컨트리”(You are my country.)였습니다. 조국을 등진 주인공 입에서 당신이 바로 나의 조국이라 고백하던 순간, 살벌했던 스파이 영화는 단숨에 가슴 깊이 파고드는 아련한 멜로 드라마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윌리엄 허트, 캐서린 터너, 지나 데이비스 주연의 영화 ‘우연한 방문객’(원제는 The Accidental Tourist, 1988년 작품)에도 가슴 먹먹해지는 고백이 등장합니다. 윌리엄 허트와 캐서린 터너는 누가 보아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부부로 ‘저 푸른 초원 위 그림 같은 집’에서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자신들의 실수로 아들을 잃고 난 후, 깊은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서로를 원망하며 냉랭한 부부관계를 이어가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윌리엄 허트는 ‘우연히’ 지나 데이비스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천식으로 고통받는 아들과 함께, 영화 제목에 등장하는 ‘투어리스트’(여행객)처럼 이곳저곳 세상을 떠돌던 중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퀄키(quirky)'(한) (사전상으로는 꾀바른, 변덕스러운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묘한 매력을 지닌’이란 뉘앙스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자 지나 데이비스 앞에서, 윌리엄 허트는 자신의 오래된 상처를 치유받으며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나 데이비스를 위해 우아하고 지적인 아내 곁을 떠나기로 결심한 윌리엄 허트에게 아내가 비난을 쏟아냅니다. “우리는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지. 나는 당신을, 당신은 나를. 하지만 당신은 그녀가 누군지 알지 못해.” 그러자 윌리엄 허트가 아내를 향해 조용히 읊조립니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지. 하지만 그건 이제 중요치 않아. 그보다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가 더 중요하지.”

“사랑이란 풍덩 빠지는 줄만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스며들기도 하네요.” ‘미술관 옆 동물원’(1998년 작품) 속 대사입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2001년 작품)에도 잊지 못할 대사가 등장하지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요즘은 영화 속에서 가슴 저린 대사를 만나는 행운이 점차 사라지는 듯합니다. 아마도 제가 나이 들어가는 탓이기도 할 테지만, 사랑의 표현도 세월 따라 변주되고 변색되고 있는 것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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