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회봉의 서드에이지 단상

“만약 네가 젊은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너는 그렇게 하겠니?”
등산길을 함께 걷는 친구에게 불쑥 물었다. 나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했다.

그는 당연히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되돌아가면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한다. 그게 뭐냐 물으니, 동대문 시장에서 옷 장사를 해보고 싶단다. 이유를 묻지는 않았지만, 바람이 소박하다.

“너는?” 그가 되묻는다. 나는 지난날이 어떠하든 인생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생각이다. 인생의 고해(苦海)를 두 번이나 건너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런데도 뜬금없이 왜 내게 그런 질문이 떠 올랐을까. 내게도 뭔가 지난날에 아쉬움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인생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굳이 타임머신을 타지 않아도 될 듯싶다. 지금 시도해도 늦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다. 인생에 예상치 않은 한 시즌이 덤으로 주어진 덕분이다. 내게 주어진 ‘서드에이지(third-age 제3 연령기)’가 그것이다. 이것이 희망을 준다.

영국의 역사학자 래슬렛이 얘기한 전통적인 서드에이지 이론은 20년을 한 연령기로 봤다. 하지만 나는 인생을 30년씩 나눈다. 태어나서 서른 살 까지는 배움으로 씨뿌리고 성장하는 퍼스트 에이지(first-age)다. 그리고 이후 육십 세까지를 일에 주력하는 세컨드 에이지(second-age)로 구분한다.

지금 나는 ‘서드에이지’를 산다. 이 연령기는 60대부터 시작해 내 기력이 쇠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내 인생을 완성하는 시기다. 그러니 내게는 가장 의미 있고 행복한 시간이 될 것이다.

이날이 지나면 죽음의 날을 카운트하는 ‘포스 에이지(forth-age)’가 기다린다. 이 기간은 짧은 게 좋다.

화려하기로는 세컨드 에이지일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시기를 들라면 나는 서드에이지를 꼽는다. 내 인생에 구멍 난 것들을 메우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을 마지막 기회다. 이를 통해 인생의 완성도를 높이길 기대한다.

이 시즌에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자문해 본다. 그것이 내 인생의 아픔과 결핍을 치유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관계(關係‧relationship)’라는 단어가 퍼뜩 떠오른다.

사진 논객닷컴DB
사진 논객닷컴DB

살아오면서 내가 신경 써서 맺어온 관계는 크게 셋이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내가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특히 사람과의 관계가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직장 생활에 올인 한 세컨드 에이지 30여 년은 일 중독자로 살았다. 그것이 조직에는 조금 도움이 됐을지 몰라도 나와 함께한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사람보다 일을 더 앞에 두면서 많은 관계에 상처를 남겼다.

여기에는 지나치게 목표지향적인 나의 성향이 크게 작용했다. 그것은 내 마음에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이 하나의 인격으로 굳어져 일터뿐 아니라 가정에서까지 까칠한 캐릭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내 지난날에서 크게 후회되는 부분이다.

다른 사람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지 못한 나의 태도는 부메랑이 돼 나를 찔렀다. 이 일을 나는 타고난 성격과 기질 탓으로 돌렸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균형감각을 가졌어야 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책장에 꽂혀있는 잠언 시집의 제목이 눈에 들어와 박힌다.

이제 나는 이 시즌에 나의 인간관계가 거듭나길 원한다. 그리 하라고 선물로 주어진 시간 위에 서 있다. 후회와 반성은 곧 통찰과 지혜로 거듭난다고 했다. 소망이 생긴다. 나의 경직된 인간관계에 유연성이 더해지길 기도한다.

생존을 위해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마냥 좋을 것만 같던 이것이 인간관계에 양날의 칼이 된다. 나에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가 되레 나를 고립시킬 가능성을 키운다.

환경과 여건의 변화는 먼저 나와 비슷한 생각이나 취미, 성향을 띈 사람들만으로 교제 범위를 축소해 나갈 개연성을 높인다. 굳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날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수십 년 맺어온 인간관계를 하루아침에 미련 없이 정리해 버릴 위험을 낳기도 한다.

한국인의 내면화된 특성의 하나인 갈등회피주의가 이러한 손절 문화 확산을 부채질한다. 여기에다 인공지능이 제공한 소통 알고리즘은 사람들의 확증편향을 강화한다.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인의 SNS 이용 추이도 이를 부추기는 요소가 된다.

하지만 타인의 다름에 손절로 대응하는 것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아 보인다. 쉽고 편한 대신 사람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기쁨과 성장의 기회가 사라진다. 사람은 다름을 받아들임으로 성장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많은 기쁨을 얻기에 그렇다.

서드에이지에 나의 약점이던 인간관계를 새로 써야 한다. 과거의 인간관계가 상당 부분 수직적인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했다면, 지금은 수평적인 사랑의 관계를 토대로 한다. 주 대상이 일과 관련한 사람들에서 가족과 친구, 이웃 등으로 바뀐 것이다.

새로 쌓아 가는 인간관계에서는 경쟁이 의미를 잃는다.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똑똑한 사람, 잘난 사람이 되려 애쓸 필요 없다. 그것은 하나 됨을 해칠 뿐이다. 이제는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다. 따듯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이로써 지난날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 아픔을 치유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러려면 내가 죽어야 한다. 욕심에 대해 죽고, 사람들의 인정에 대해 죽어야 한다. 판단에 대해 죽고, 분노에 대해 죽어야 한다. 시기와 미움에 대해 죽어야 한다. 그럴 때 내 안에 나와 이웃을 살리는 생명이 흐른다.

인생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물질과 인정에 대한 욕망은 조금씩 사그라드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판단하는 습성은 그 심각성이 여전하다. 아직도 사람을 판단하고 상황을 판단한다.

판단은 신의 영역이다. 그런데 여전히 누군가의 말과 행동을 판단하는 나를 본다.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심각한 교만이다. 지난 수십 년 사람과 상황을 판단하는 일에 종사해 온 데 따른 후유증도 없지 않은 듯하다.

판단을 멈추지 않는 한 좋은 인간관계를 기대할 수 없다. 판단은 죄이고, 죄는 상대방에게 고통과 분열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나는 판단하지 않고, 오직 옳고 그름을 분별해야 할 뿐이다. 그럴 때 인간관계에 후회가 없을 것이다.

한 그루 고목으로 성장해 가고 싶다. 더 이상 꽃을 피우지 않아도 고목은 아름답다. 그 앞에 서면 숙연해진다. 속이 썩고 가지가 부러졌어도, 그 안에서 생명이 도도히 흐른다. 그 생명의 기쁨과 평화가 타인에게 쉼을 줄 것이다.

고목 소리 들으려면

                    조오현


한 그루 늙은 나무도
고목 소리 들으려면

속은 으레껏 썩고
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

그 물론 굽은 등걸에
매 맞은 자국들도 남아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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