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건 드라이펜]

“개망골 가서 개 잡아서, 뚜두랭이 가서 뚜드려서, 솥동뫼 가서 솥 걸어서, 삼막굴 가서 삶아서, 웃뜸 가서 뜸 들여서, 먹골 가서 먹자꾸나.”

여기에 나오는 지명은 제 고향 충남 서천군 종천면 종천리 일대에 있는 마을의 옛 이름들입니다.

어렸을 적 어른들이 부르던 타령 속에 들어있던 마을 이름들입니다. 잔치 때 돼지 잡는 일은 있었지만, 개를 잡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개망골이라는 마을 이름에 운을 맞추기 위해 개 잡는 노래가 됐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개망골은 쑥골처럼 개망초가 많은 동네라서 붙인 이름일 것 같고, 뚜드랭이는 ‘랭이’가 고개 ‘령(嶺)’의 우리말인 것으로 미루어 고개 이름일 것 같습니다. 솥동뫼는 솥과 관련된 이름 같고, 삼막골은 삼(모시 또는 대마) 밭이 있던 동네, 윗뜸 아래뜸 할 때의 ‘뜸’은 ‘골’과 같이 고을이겠고, 먹골은 먹이나 먹을 만드는 숯과 관련된 이름일 것으로 여겨집니다.

종천면에는 나지막한 고개도 몇 있습니다. 집에서 동쪽으로 4km쯤 떨어진 국민학교를 갈 때 넘어야 하는 수리너머고개가 있고, 서쪽으로는 가까이에 어랭이(於嶺) 고개가 있습니다. 수리너머고개는 해발 100m남짓한 고개이고, 뜻도 독수리가 넘는 고개 같은데, 어른들은 스무 명이 함께 너머야 산적이 못 덤비는 험준한 고개인 양 겁을 주었습니다.

사진은 컬럼의 특정내용과 관련이 없음@논객닷컴DB
사진은 컬럼의 특정내용과 관련이 없음@논객닷컴DB

그 고개 중턱에 큰 소나무가 있는 묘지가 있는데, 그 소나무에서 처녀가 목매 죽었다는 소문과 함께 나무에 핏자국이 남아 있다 해서, 그 곁을 지날 때마다 아이들은 공포에 떨었지요. 어느 날 하교 길에 친구들과 함께 묘지로 가서 확인한 것은 소나무 기둥에 검붉게 눌러 붙은 송진이었지요.

그 후 공포는 줄었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밤늦게 혼자 그곳을 지날 때는 역시 으스스했습니다. 지금도 어쩌다 고향 가는 길에 자동차로 그 길옆을 지나칠 때가 있지만 이제는 노송이 된 소나무의 송진도 그대로 있는지 궁금해지죠.

어랭이 고개는 눈이 많이 내린 겨울이면 대나무를 반으로 쪼개 바닥을 매끄럽게 다듬고, 코를 위로 휘게 만든, 스키를 메고 고개 위로 올라가 300m쯤 되는 자동차 길을 따라 타고 내려오던 추억이 어린 곳입니다. 지금은 옆에 4차선 도로가 생겨 꾸불꾸불한 옛길은 없어졌지만, 고개 마루 옆에 부모님 묘소가 있어, 저하고는 뗄 수 없는 인연이 이어지고 있는 고개입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명이 한자화했고, 순수 우리말 이름도 한자로 바뀐 게 많지만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리(里) 안의 작은 동네의 우리말 옛 이름은 살아있었습니다. 지금 전국의 주소가 도로명으로 개편돼, 고향 동네 주소도 '서천군 ㄱㄴ로 12길 123' 등 숫자로 불립니다.

종천리에서 제가 살았던 부락 이름은 ‘부내(府內)’입니다. 조선 시대 번듯한 관청이라도 있었을 법한 이름인데 전혀 그런 흔적이 없는 한적한 농촌마을입니다. 그 이름은 단순히 ‘부내복종’이라는 명당이 종천리 일대에 있다는 풍수서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복종(伏鐘)’은 쇠북을 엎어 놓은 형상의 산을 뜻한다는데, 보기에 따라 그런 형상이 아닌 산이 없겠지요.

서천의 이웃 보령 출신인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토정비결의 저자인 토정 이지함과 신라 말의 도참설의 고승 도선국사가 점지했다는 ‘부내복종’은 부내라는 마을 이름 하나를 남긴 것 외에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지관을 앞세워 이 명당을 찾기 위해 외지 사람들이 많이 종천을 찾았다는 얘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발길은 끊겼습니다. 찾는 이 없는 지관의 유튜브에 더러 부내복종 얘기가 눈에 띕니다. 화장이 대세인 시대조류에 따른 것이긴 하겠으나, 경조사상의 퇴조를 보는 것 같은 씁쓸함도 있습니다.

마을 앞을 흐르는 종천천의 상류에 개복다리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우리 동네 부내에선 4km 쯤 떨어진 산골마을입니다. 그곳에서 매일 8km를 걸어서 학교에 다닌 동창 두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 반에서 가장 원거리 등교생이었고, 그중 한 명이 6년 개근상을 받는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1960년대 종천 들판에 농업용수를 대기 위한 저수지를 그곳에 축조하는 통에 동네는 수몰됐습니다만, 개복다리 저수지는 어린 시절 필자의 낚시터였습니다. 나의 키보다 세배쯤 긴 대나무 낚싯대를 어깨에 메고 낚시터로 향하던 나의 모습을 떠올리면 웃음이 절로 납니다.

플라스틱 낚싯대와 ‘고래심줄’로 불리던 나일론 낚싯줄도 귀했던 시절이어서 가늘게 꼰 노끈을 낚싯줄로 삼고, 수수깡으로 찌를 만들어 낚시를 했지요. 서울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장비를 갖춰 더러 낚시를 다녔는데, 월척붕어를 잡아 본 것은 개복다리 저수지에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지도에 그 저수지는 개복다리가 아니라 종천저수지로 올라 있습니다.

지금의 도로명 체계에서 순 우리말의 정겨운 마을 이름들도 하나둘 잊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고향만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와 농어촌을 막론하고 전국의 모든 마을에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정부는 도로명 주소를 ‘K-주소’라고 자랑만 할 게 아니라 동네 한가운데에 마을 이름과 이름의 유래를 새겨 넣은 표지석 하나쯤 남겨놓을 생각도 해야 맞지 않나요?

그런 일은 저마다의 동네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으나 이름의 유래를 고증하는 작업 등은 일관성과 체계를 갖추기 위해 행정관서에서 맡는 것이 효과적일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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