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그랬던 것도 같다. 멋있는 사람이 멋있어 보였다. 주변에서 인정받는 유능한 사람, 자기관리가 철저해서 보푸라기도 군살도 없는 선배들을 닮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회사에서 잘 나가고 싶다는 욕망이 있어서였을까. 주말엔 자기계발 책도 읽고 그랬다.

그 멋있던 선배들이 제 이익을 위해 아랫사람의 공을 가로채고, 불륜을 저지르는 모습을 보자 환상은 와장창 깨졌다. 다음으로 동경하게 된 사람은 주변을 잘 챙기는 따뜻한 선배들이었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그들은 이해관계보다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움직였다.

사진 KBS '고려거란전쟁' 방송화면 캡쳐
사진 KBS '고려거란전쟁' 방송화면 캡쳐

'고려거란전쟁'에서 강감찬을 보는 느낌이랄까. 먼치킨보다 인격자가 드문 세상에서 지조를 지키는 사람을 롤모델로 삼게 되었지만, 금방 마음에서 멀어졌다. 특별히 실망스러운 일이 있던 건 아니다. 내 깜냥으론 그런 사람이 되기 어렵다는 걸 진작 깨달아서다.

그래서 한동안 방황했다. 이 사람을 따르자니 이 부분이 아쉽고, 저 사람을 존경하자니 저 부분이 부족했다. 그러다 눈치채고 말았다. 뭔가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걸.

회사는 다니면 다닐수록 답이 없어 보였고, 탈출구를 찾지 못해 허우적대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 미궁에서 길을 밝혀줄 누군가를 찾으려 했던 것 같다. 나를 따르라고 외쳐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카리스마 있는 리더든, 덕이 있는 지도자든 상관없었다. 내가 잘못 가고 있다는 느낌을 없애주기만 하면 족했다. 그래서 좋은 점을 배우려는 노력은 게을리하고, 무작정 의지할 사람을 찾게 된 거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이 가까운 지금은 안다. 회사에 롤모델은 없다. 짠하게 좌충우돌하는 개인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높고 대단해 보이던 임원은 건강검진 결과에 불안해하며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시고, 직언을 마지않던 강감찬 닮은 팀장은 연거푸 승진에 실패해 회사에 계속 다녀야 하는지 고민한다. 누구나 각자의 '고려거란전쟁'을 치르고 있다.

지금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은 뛰어난 능력과 인격을 가진 이가 아니다. 자기를 객관화할 줄 아는 사람이다. 회사와 자신을 분리하고 회사 안에서 내 역할과 위치를 담담하게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무리해서 자기의 건강과 감정을 소모하지 않는다.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다. 담담하게.

타인의 좋은 점을 배우고 싶은 건 건강한 욕망이다. 그러나 아우라인지 피리 부는 사나이의 피리소리인지 모를 것을 무작정 따르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그러니 다짐한다. 2024년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가 되자.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내가 되자. 멋있지 않아도 좋다. 롤모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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