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낮잠을 잔다. 실컷 뛰어놀고 간식도 잘 먹고, 엄마 품에 안겨 잠을 청한다. 천사가 따로 없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12월 24일이다. 아빠인 나는 크리스마스 카드에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지금부터 나는 산타 할아버지다. 발신인은 아빠가 아닌, 산타 할아버지다.

아직 글을 읽기엔 너무 어린 아기지만, 산타 할아버지의 입으로 편지를 들려주고 싶어서 펜을 들었다. 내일의 대독(代讀)이 기대된다. 

“우리 왕자님! 오늘 말 잘 들으면, 코~하고 있을 때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이랑 편지를 갖고 오실 거야”라고 말할 생각에 벌써 신이 난다. 아빠가 더 아이 같다고 해도 별 수 없다.

산타 할아버지를 주어로 삼아 아들에게 편지를 써 내려간다. 그 글의 조각조각을 이곳에 옮긴다.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 아빠랑 어린이집 선생님들께서 많이 말씀해 주셨지? 우리 왕자님이 말 잘 듣고, 밥도 잘 먹고,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으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가져다줄 거라고.”

산타 할아버지의 목소리로 내일 이 편지를 들려줄 생각에 웃음이 난다. 그러면서 동시에 주책맞게 부모님의 얼굴이 스친다. 키워봐야 안다더니. 아들인 나를 기쁘게 할 생각으로 얼마나 많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지새우셨을까. 

다시 산타 할아버지는 말을 이어간다. 실제 편지에서는 아들의 이름을 썼는데, 이 칼럼에서는 편의상 ‘왕자님’으로 계속 기재하고자 한다.

크리스마스 카드@석혜탁 촬영
크리스마스 카드@석혜탁 촬영

“우리 왕자님을 지켜보니, 쉬야도 잘하고, 응가도 잘하고, 밥도 안 남기고 잘 먹더구나.
또 엄마랑 아빠랑 그리고 선생님,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애교도 많이 부리고 예쁜 짓도 많이 하더라. 참 착하고 사랑스럽더구나.”

편지를 쓸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글로 옮겨보니 놀랍기만 하다. 어른 변기에서 까치발을 들고 쉬하는 아들을 보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아직 기저귀를 차는 친구들도 있는데, (물론 기저귀를 차는 것도 귀엽지만), 명절 때 두 살 차이 나는 사촌 형이 씩씩하게 소변보는 모습을 보고 자극(?) 받아 이내 서서 소변보는 것을 체득한 꼬마 왕자님이 참 예쁘다. 

이게 사랑인가. 그저 기특하고, 매사에 감사하다. 아이가 웃어주면 나의 심장이 녹아내린다. 작은 숟가락으로 밥과 국을 볼에 묻히며 잘 먹는 모습을 보면, 정말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통통한 종아리를 내 배에 올려놓고 장난치는 것도 참 좋다. 이게 효도지. 산타 할아버지한테 선물 받을 자격, 차고 넘친다. 

“우리 왕자님이 참 기특해서 산타 할아버지가 루돌프 사슴이랑 멀리서 이렇게 집으로 왔단다. 근데 시간이 너무 늦어서 잠자는 귀여운 모습만 보고, 이제 다른 친구들 집에도 가야 한단다. 늘 건강하고 행복해야 한다. 밥도 잘 먹고, 어른들 말 잘 듣고! 
산타 할아버지가 또 올게. 다시 한번 메리 크리스마스!”
 
이 글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썼고, 내일 아침을 기다리고 있다. 편지와 함께 아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빨간색 차도 선물로 준비했다. 

저녁 먹을 때 “아빠가 산타 할아버지한테 전화 좀 하고 올게”라고 말도 했더랬다. 식당 옆자리의 몇 살 더 많은 아이가 그걸 듣고는 산타 할아버지한테 전화 거는 게 가능하냐고 본인 아빠에게 갑자기 질문해서 적잖이 당황했다.

내일 우리 아이는 산타 할아버지에게 첫 편지를 받게 된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쩍 많이 드는 생각이 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귀한 존재라는 것. 길을 걸을 때, 버스를 탈 때, 밥을 먹을 때, 카페에 있을 때, 늘 아이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필자의 아들뿐 아니라, 지구 위의 모든 아이들이 행복한 성탄절을 보내길 희원한다. 
그들에게도 빠짐없이 산타 할아버지의 미소와 온정이 전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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