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경아 쉼표]

#땡감은 여름의 따가운 햇살과 가을의 서늘한 바람을 받아 떫은맛이 단맛으로 변하고 딴딴한 껍질도 부드러워진다. 땡감이 홍시가 되면 꼭지가 빠지고 땅으로 떨어진다. 땅에 떨어져 제 몸이 깨지면서 홍시가 외치는 말씀. “나도 젊을 때는 무척 딴딴하고 떫었지요.”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읽은 주옥 같은 문장입니다. “홍시여 잊지 말라 너도 젊었을 땐 떫었다는 것을(たるがきの 澁きを忘るるな)”이라고 노래한 나쓰메 소세키(1867~1916)의 짧은 시를 바탕으로 쓴 글일 겁니다. 젊은 날, 고집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떫게 살다가 겨우 단맛이 돌고 부드러워질 때쯤엔 스러지는 우리네 인생을 어쩜 이리 잘들 표현했을까요.

까치밥 먹는 까치@사진 연합뉴스
까치밥 먹는 까치@사진 연합뉴스

출근길, 전철역 플랫폼에 서 있는데 키 작은 담벼락 너머 붉은 슬레이트 지붕 집 마당에 까치밥이 보입니다. 몸이 반쯤 터진 홍시가 아슬아슬하게 감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있습니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그것은 꽃보다 화려하고 고울 뿐만 아니라, 새들에겐 별미 중의 별미입니다. 까치밥이라고 까치만 먹을까요. 딱새도 먹고, 직박구리도 먹고, 또 이름 모를 새들도 맛나게 먹겠지요.

‘까치밥’ 하면 193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 벅(Pearl Sydenstricker Buck·1892~1973)이 떠오릅니다. 한국 사랑이 유별났던 작가죠. 역사 소설 ‘살아 있는 갈대’에서 “한국은 고상한 민족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대놓고 극찬했잖아요. 그가 한국 땅에 와 한국인에게 깊은 애정을 느낀 ‘까치밥 일화’는 언제 들어도 가슴 따뜻합니다.

1960년 경상도 어느 시골 마을. 한국에 처음 온 펄 벅은 감나무 꼭대기에 달린 감들을 보며 묻습니다. “저 감들은 따기 힘들어서 그냥 둔 건가요?” 그날 그녀와 함께했던 이규태 당시 조선일보 기자가 말합니다. “아, 저거요, 까치밥이에요. 새들을 위해 남겨둔 거죠.” 펄 벅이 흥분된 표정으로 말합니다. “바로 이거예요! 한국에 와서 보고 싶었던 건 고적이나 왕릉이 아니에요. 까치밥을 본 것만으로도 한국에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쟁 이후 너나없이 먹고살기 힘든 시절인데도 날짐승과 먹을 것을 나누는 우리네 인심을 알아봤던 거죠.

송수권(1940~2016)은 시 ‘까치밥’에서 장대로 까치밥 따는 철없는 조카아이들을 나무랍니다. “고향이 고향인 줄도 모르면서/ 긴 장대 휘둘러 까치밥 따는/ 서울 조카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남도의 빈 겨울 하늘만 남으면/ 우리 마음 얼마나 허전할까// 살아온 이 세상 어느 물굽이/ 소용돌이치고 휩쓸려 배 주릴 때도/ 공중을 오가는 날짐승에게 길을 내어주는/ 그것은 따뜻한 등불이었으니/ 철없는 조카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하략)”

우리 조상들의 넉넉한 마음은 콩 농사에서도 엿볼 수 있어요. 콩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한 구멍에 콩 세 알씩을 심었대요. 한 알은 하늘의 새, 또 한 알은 땅속 벌레, 그리고 남은 한 알만이 농부 몫이었다고 해요. 문득 지금 농부님들은 어떻게 할지 궁금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과 나누는 마음. 찬바람 부는 이맘때 가장 빛나는 정(情)이지요. 어렵고 외로운 이들의 몸과 마음을 녹여줄 포근한 손길이니까요. 오늘도 얼굴 없는 천사들은 이곳저곳에서 온기를 나누고 있겠지요. 며칠 안 남은 2023년이 넉넉한 마음으로 따뜻하게 흘러갑니다.

자유칼럼그룹 독자님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올 한 해도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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