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회봉의 서드에이지 단상

얼마 전 둘째 아들 결혼식이 있었다. 나에게는 더없이 즐겁고 행복한 날이었다. 51년 전에 내 고등학교 동기들이 만든 합창단 ‘Y-glee’의 축가가 혼례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돼 감동을 배가했다.

결혼식장에서 축가는 대개 신랑이나 신부의 친구가 부른다. 간혹 전문 소리꾼이 초빙되어 축가를 선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20명이 넘는 아빠 친구들이 큰 사랑을 담아 두 사람을 축복하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축가를 부르기에 앞서 Y-glee를 대표해 김경호 목사가 전한 인사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결혼이란 것은 신랑이 가져온 세계와 신부가 지내온 세계, 이 두 세계가 만나는, 우주와 우주가 만나는 가슴 설레는 출발입니다….

이 노래는 단지 아버지의 친구로서 부르는 게 아니고, 우리 모두 함께 아버지가 되어 새 가정을 맞이하는 신랑 신부를 지켜보고, 격려하고, 앞으로 돕겠다는 마음을 담아서 함께 부르겠습니다.”


/나의 은총을 입은 이여 너를 아노라
너의 이름을 내가 아노라

나의 사랑을 아는 이여 함께 가노라
내가 친히 함께 가노라…         /

    Y-glee (사진=최회봉)
    Y-glee (사진=최회봉)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노래 ‘축복하노라’의 노랫말에 아름다운 하모니가 입혀져 듣는 이의 가슴을 가득 채운다. 축제처럼 결혼식을 마치고도 아내는 녹음된 축가와 인사말을 되풀이해 듣는다. 그 행동에서 무한한 감동과 감사가 묻어난다.

이제 내 마음이 날아갈 듯 가볍다. 우리 나이가 되면 누구나 감당해야 하는 책무이자 권리이기도 하지만, 큰 숙제를 하나 끝낸 기분이다.

주위에서 건네는 인사말도 바뀌었다. “이제는 집에 부부만 남았네요. 두 분이 더욱 서로를 위하며, 행복하게 사세요.”

새로운 가정을 꾸린 아들네와 집안에 둘만 있게 된 우리를 돌아보니, 부부의 의미가 새삼 크게 다가온다.

내 마음에는 늘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있다. 종이장의 네 귀퉁이 중 한 곳만 붙잡아 주어도 훨씬 수월할 것 같다는 아내의 바람을 한 번도 못 들어 준 데 대한 미안함이다. 여러 가지가 그랬지만 특히 육아에 대한 무심함이 그랬다.

“나만 그랬나? 우리 때는 다 그랬지.”라고 변명해 보지만, 분명히 잘한 일은 아니다.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 때도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 제법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의 변명이 구차하다.

그래서 아들 결혼식 축사 때 그런 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 제가 한평생 바깥일을 핑계로 가정일에 소홀했는데도 두 아들을 잘 키워준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사실 이날 축사는 나의 아들 부부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내 가정이 받은 큰 복을 잘 지키고 누리기 위해 나에게 적용해야 할 것들이었다. 이를 되새김질해 본다.

결혼은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두 세계, 두 우주가 만나 하나로 융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경쟁이 아닌 조화와 질서가 요구된다.

둘이 하나가 될 때 부어지는 축복과 선물이 있다. 그것은 평화와 기쁨이다.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을 누구에게도 빼앗겨서는 안 된다.

부부가 하나 되는 데는 ‘결혼은 경쟁 관계가 아닌 보완 관계’라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원리가 작동한다. 너무 당연한 말 같아 오히려 무시되기도 한다. 나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결혼 38년이 지나서야 절감한다.

부부가 경쟁 관계로 사는 사람도 있나?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렇지 않다. 부부가 때때로 다투고 서로를 힘들게 하는 것은 모두 그 밑바탕에 ‘경쟁 관계’가 도사리고 있는데 기인한다.

옛날, 그러니까 우리 세대가 결혼할 때는 선배나 친구들이 예비 신랑을 불러 앉혀 놓고 해주는 첫 번째 훈수가 “여자는 신혼 첫날부터 꽉 잡아 놓아야 해.”라는 말이었다. 요즘에야 이런 말 하는 사람 없겠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결혼을 두 사람의 경쟁 구도로 본 것이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에게 그의 선배들이 한 조언이라고 해서 크게 달랐을까 싶다. 그렇게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결혼생활을 시작하면, 두 사람 모두 평생 고통스럽다.

일생을 가장 가까운 사람과 힘겨루기하며 사는 삶은 지옥일 수밖에 없다. 그들의 입에서는 “저 남자는 평생 저 모양이네….”, “이 여자는 한 번도 지지를 않는구먼….”하는 투덜거림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결혼의 요체는 경쟁이 아니라 보완이다. 불완전한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보완함으로써 하나의 완전체를 이루는 것이다.

부부는 요철(凹凸)과 같다. 요즘 아이들이 즐겨하는 퍼즐과도 같다. 상대방이 볼록하면 내가 오목하게 되어 감싸주고, 상대방이 파인 곳은 내가 메워주는 것이다. 그렇게 어떤 것으로도 뗄 수 없는 견고한 융합 체를 이루는 것이다.

‘경쟁’이 아닌 ‘보완’이 부부관계에 근간이 되려면 특별히 두 가지가 중요해 보인다. 둘 사이에 오가는 ‘말’과 그들의 ‘마음가짐’이 그것이다.

말만큼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다. 말 한마디로 상대방에게 천국을 선사하기도 하고 지옥을 맛보게도 한다. 또 자기가 한 말이 부메랑이 돼, 스스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기도 한다.

내 가정을 어떤 곳으로 만들지는 나의 말에 달려 있다. 그러니 배우자와 대화할 때 천국의 언어를 써야 한다. 작은 일에도 공감해 주고 칭찬해 주어야 한다. 아내에게 부드럽게 말하고, 남편에게 예쁘게 말해야 한다. 이것이 두 사람 습관과 태도로 자리 잡아, 성품과 인격으로 굳어져야 한다.

그런데 사람 사는 게 늘 좋을 수만은 없다. 만약 배우자가 잠깐 실수해 나를 언짢게 하거나 섭섭하게 하는 말을 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때는 그 말에 반응하지 말고 속으로 외쳐라. “PASS~! PASS~!”.

날아 온 말을 붙잡지 말고 통과시켜 버리는 것이다. 나를 격동시키는 그 말은 진실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가정의 평화와 기쁨을 지키는데 또 하나 중요한 게 있다. 가정 안의 모든 일을 대하는 두 사람의 ‘마음가짐’이다.

둘째 아들 상견례 때 내가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두 사람이 누워 TV를 보다가 잠잘 시간이 돼 전등을 꺼야 한다면, 누가 일어나야 하지?”

그때 살짝 당황한 며느리가 조그만 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끌게요”

그 답은 남편이 일어나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아내가 일어나야 하는 것도 아니다. 두 사람 중 더 성숙한 사람이 일어나 끄면 되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보다 강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일어나야 한다면, 지금 경쟁 관계에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기쁨과 평화가 없다. 오직 불만과 불평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가 집안에서 늘 “내가 더 성숙하니, 내가 이 일을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산다면, 그들의 결혼생활은 보완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때는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이 얼마나 힘이 들든,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넘칠 것이다.

부부는 경쟁자가 아니다. 서로를 보완함으로써 완성해 주는, 하나뿐인 짝이다. 아파치족 인디언은 새로 부부가 되는 두 사람을 이런 말로 축복했다.

/이제 두 사람은 비를 맞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줄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춥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따듯함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동행이 될 테니까.
두 사람은 두 개의 몸이지만,
이제 두 사람의 앞에는 오직 하나의 인생만이 있으리라.
이제 그대들의 집으로 들어가라.
함께 있는 날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대지 위에서 그대들은
오랫동안 행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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