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우리 엄마가 캣맘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나는 캣맘을 혐오할 수 없어졌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행위에 중립적이었다. 길고양이에 대한 측은지심도 이해되었고, 길고양이가 유해조수인 사실도 이해되었다. 당장 나와 관련 없었기에 가치 판단을 유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하철 역 앞에서의 그 장면 이후로는 길고양이에게 밥 주는 행위를 측은지심으로 읽지 않았다.

사진 김봉성
사진 김봉성

초겨울이었다. 바람이 강해 어딘가에서 날려 온 비닐봉지가 도로를 휘저어대던 날이었다. 지하철 역 입구에 노파가 돗자리를 깔고 앉아 양말, 스타킹, 면봉, 때수건 등 가벼운 잡동사니를 팔고 있었다. 맞은편 편의점에는 길고양이가 포식 중이었다. 대학생들 손에 통조림과 젤 형태의 무언가를 짜주고 남은 스틱이 들려 있었다. 나는 노파가 노상에서 컵라면을 먹던 장면을 기억했다. 고양이가 귀염 받는 풍경을 멀뚱히 바라보는 노파의 풍경이 아팠다. 홧김에 노파의 양말 몇 켤레를 샀다. 인근 시장보다 몇 백 원 더 비싸다는 것을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알고 있었다.

이날 이후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는 미(美)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해했다. 귀엽고 예쁜 것을 향한 이타심은 특별한 감정이 아니라 보편적 충동이다. 홧김에, 술김에, 저질러버린 본능,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캣맘은 도시 생태를 파괴하는 고양이의 이면을 보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이었다. 인간이 먼저 고양이의 생태를 빼앗았다는 논리를, 고양이가 새와 작은 들짐승의 생태를 빼앗았다는 논리로 돌려주고 나면, 캣맘을 마음껏 혐오할 수 있었다. 이타심으로 포장된 무책임한 악당이 자신이 선한 줄 아는 모습을 볼 때, 역겨웠다. 그런데 그게 우리 엄마랬다.

“밥 먹었나?”

안부 전화에서 엄마는 늘 내 끼니를 걱정하셨다. 내 자취방 냉장고는 사실상 엄마 것이었다. 김치와 밑반찬을 택배로 붙이셨다. 명절에는 반찬통으로 테트리스를 하시고 나서야 뿌듯해 하셨지만, 나는 가득 차 있는 냉장고가 답답했다. 냉장고가 차면 내 끼니는 냉장고로 강제되었다. 김치를 보낸다 보내지 마시라 실랑이 끝에 고양이 이야기를 덧붙이셨다. 동네 공장 인근 길고양이 밥을 챙기신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새벽에 조깅을 하셨다. 그 길에 눈에 밟히는 고양이가 있어서 집에 있는 개밥을 나눠 주셨다고 하셨다. 그 이후 고양이가 엄마의 조깅 길 초입을 지키고 있다가 엄마를 반겼다. 그래서 엄마는 고양이 밥을 챙기게 되신 것이다. 날씨가 추워지자 고양이 걱정까지 더하셨다. 당신은 멀리서 내 밥을 챙기시더니 이제는 길고양이 밥까지 챙기시는가. 나는 판단하지 않았다. 길고양이는 식수 구하기가 어려워 신부전증을 겪으니 물도 챙기시라는 말만 더했다.

내 끼니를 챙기는 엄마의 마음을 안다. 모든 엄마는 자식에게 당신의 필요를 증명하고 싶다. 개별자를 포기하고 내 엄마에 충실하신 당신에게, 밑반찬은 엄마로 기능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기 증명 방식이다. 특히 우리 엄마는 내가 설에 가지고 내려가는 빈 반찬통이 고맙다고 하시는 분이다. 고양이 밥은 나를 돌보시던 습관이었을 것이다. 그 마음에 논리를 갖다 댈 수 없었다.

논리는 결국 자기 마음을 합리화 하는 방어 기제다. 의지적 행위든, 비의지적 반작용이든, 이타적 행위는 그 자체로 고귀하다며 논리를 선회한다. 눈앞의 생명을 아낄 줄 아는 마음이 인간을 아낄 줄 아는 마음의 원천이 될 것이다. 측은지심은 지탄의 대상이 아니다. 합리성의 외피를 두른 냉정함이 합성하는 것은 인간중심주의일 뿐이다. 인간을 중심으로 이질성 배제 습관은 내재화 되어 언젠가 인간을 가르게 될 것이다. 내가 흡연자, 층간/벽간 소음 유발자, 공공장소에서 이어폰 안 쓰고 음악 듣는 자를 마음속에서 죽였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나 같은 세상은 나도 무섭다.

사진 김봉성
사진 김봉성

캣맘을 품고 보니, 나는 ‘모든 흡연자를 죽여주세요.’라고 빌지 못함을 알았다. 내 동생과 친한 지인 중에 흡연자가 있다. 흡연을 단 한 번도 기호품이라 여긴 적 없고, 흡연이 미개한 습성이라는 생각을 철회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그들을 전적으로 미워할 수 없다. 관계는 논리를 초월한다.

이질성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진 증상, 혐오다. 아랫세대의 관계 능력이 떨어진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얇고 넓은 관계는 능숙하게 맺고 끊더라도, 그 정도의 깊이는 논리를 건드릴 수 없다. 온라인은 동질화를 가속하며 이질성과의 교류 기회를 줄인다. 크고 작은 부당함을 ‘고구마’로 정의하고 즉각적인 ‘사이다’를 원하는 생태는 혐오가 자라기 좋은 환경이고, 실제로 혐오는 일상화 되어 간다.

온라인에서 체류하는 시간이 많은 사람과 오프라인에서 체류하는 시간이 많은 사람에게 ‘인간’은 과연 같은 의미일까? 고양이의 온기를 아는 사람을 너머 노파에게 필요한 온기를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결국 사람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우선, 설을 제외하면 사람과 먹은 끼니가 10끼가 안 되는 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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