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숙 탐독]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사건 사고 소식을 들으며 마음이 몹시 심란합니다. 오랫동안 영문학 고전들을 공부하면서 많은 작가들이 지닌 이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염세주의나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에 대한 혐오감을 보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염세주의와 혐오감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사건들이 지금 우리 주변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도 고전 작가들의 작품 속 악인들은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파멸시키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와 달리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 사고들은 불특정 다수의 삶을 처절하게 파멸로 이끄는 잔인함을 띠고 있습니다. 우선 전국에서 우후죽순 터지고 있는 전세 사기 사건을 들 수 있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전세 사기 사건의 엄청난 피해자들 중 상당수가 20, 30대의 젊은 사회 초년생이거나 신혼부부라고 합니다. 전국적으로 그 피해자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지금도 계속 사건이 터지고 있습니다. 뜻하지 않게 이런 비극을 맞이한 세입자들 중 안타깝게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비보(悲報)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저리고, 이런 범죄를 예방은커녕 사후 수습도 못 하는 우리 사회의 무능에 화가 치밉니다.

이 외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코인이나 주식 리딩방 사기, 보이스 피싱 사건, 투자 사기 등은 남녀노소 누구나 먹잇감이 될 수 있어 우리를 끊임없이 긴장하고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전청조 사기 사건이나 최근 벌어진 가슴 아픈 이선균 배우 사건까지.

고 이선균 배우 협박범@사진 연합뉴스
고 이선균 배우 협박범@사진 연합뉴스

21세기 대한민국은 200년 전 영국의 소설가 윌리엄 새커리(William Makepeace Thackery, 1811~1863)가 쓴 『허영의 시장』(Vanity Fair) 속 영국과 판박이입니다. 『허영의 시장』은 19세기 초 빅토리아 시대의 산업화와 함께 물질에 대한 집착과 사회적 지위 상승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 사회를 냉소적으로 풍자한 소설입니다. 레베카 베키 샤프라는 가난한 고아 출신의 젊은 여성이 사회의 박대와 차별에 항거하기 위해 신분 상승을 위한 처절한 투쟁을 하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베키는 상류 사회로 진입하기 위해 자신의 매력적인 미모와 사교술, 위선적 행동, 사기, 계략을 동원하여 남성들을 유혹하곤 합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베키의 삶에는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빅토리아 시대의 온갖 병리적 요소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 ‘허영의 시장’이라는 제목은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이 쓴 기독교 우화 소설인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1678)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 주인공 크리스천이 피해야 할 수렁 중 하나인 ‘허영’이라는 장터는 인간의 온갖 세속적 욕망을 상징하는 알레고리입니다. 이런 상징적인 제목을 앞세우고 새커리는 베키가 접하는 많은 사람들의 탐욕과 위선을 파노라마식으로 보여줍니다.

새커리는 이들의 삶의 여정을 종종 전쟁에 비유합니다. 예를 들어 이 소설 제 2장의 제목은 ‘샤프 양과 세들리 양, 전장으로 나갈 준비를 하다’입니다. 베키 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돈과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치열한 투쟁과 경쟁을 하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이런 표현 때문에 지금 우리 사회의 현상을 보며 이 소설을 떠올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전쟁터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익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먹잇감으로 삼는. 소설 속 베키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물질주의 가치관을 좆는 자이면서 동시에 그 가치관의 희생자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새커리는 이 소설에서 당시 영국 사회를 "허울만 좋고 삭막하여 어리석기 짝이 없는 곳이기에 온갖 사기와 허위 허식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라고 묘사합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우리 사회가 200년 전 새커리가 표현한 딱 그 모습 아닌가요? 최근 발생한 추악한 범죄의 동기도 대부분 금전에 대한 숭배와 동경이 빚은 결과이고요. 허황된 욕망에 홀린 사람들은 범법이나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라도 돈과 부와 명예를 차지하지 못해 안달입니다. 착실하고 성실하게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이 바보 취급당한 것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벼락부자’, ‘벼락거지’ 같은 어휘들은 사람들이 얼마나 요동치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여실히 말해 줍니다.

소설 맨 마지막에 작가의 대변인이라고 할 수 있는 화자는 인간이 지닌 욕망의 허망함을 다음과 같이 탄식합니다.

아! 헛되고도 헛되도다! 우리 중 누가 대체 이 세계에서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중 누가 과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단 말인가? 설사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 한들 만족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새커리가 세상 모든 존재에게 던지는 이 마지막 메시지를 곱씹으며 허무와 무상으로 돌아갈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 존재 조건이고 비극적 본성인 이 ‘허영의 시장’에서 어찌 갈피를 잡고 살아갈지 깊은 고심에 빠집니다.

#이 칼럼은 논객닷컴과 자유칼럼 그룹간의 전재 협약에 따라 게시된 글입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